전시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의 부설 이후 부평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교통 및 지리적 이점이 작용하여 일제는 부평에 대규모 군수시설인 인천육군조병창을 건설하여 강제 동원의 현장으로 삼았습니다.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 기지는 부평을 새로운 도시로 변화시켰으며, 1970년대 부평수출산업공단 조성에 따라 산업 도시로 또 한 번 변화를 겪으며 굴곡진 현대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부평역사실에서는 이러한 근·현대 부평의 모습을 다양한 유물과 함께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1. 전통시대의 부평
전통시대에는 자연지형에 따라 행정구역이 나뉘고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가현산, 계양산, 만월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은 부평과 인천의 행정적·문화적 경계가 되었다.
옛 부평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주부토군, 장제군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도호부, 계양도호부, 길주목으로 불리다가 1310년(충선왕 2년)에 '부평부'로 변경되면서
부평이라는 지명이 등장하게 되었다. 부평부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부평도호부, 부평현 등으로 읍격의 변화가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의 변화에 따라 부평군이 되었다.
행정구역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구와 계양구, 서구, 경기도 부천시 일부,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부를 포함하였다.
주요전시유물 l 부평이씨 세보
주요전시유물 l 동국이상국집
2. 경인철도의 개통과 대도시 부평의 시작
1899년 9월 18일,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경인철도가 한반도 최초로 개통되었다. 당시 인천역, 축현역, 우각동역, 부평역, 소사역, 오류동역, 노량진역 등
7개의 역이 개설되었고, 33.2㎞ 구간을 하루 2차례 왕복 운행하였다. 경인철도의 개통은 부평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경인철도 개통 이전 계양산 남쪽이었던
부평의 중심은 개통 이후 지금의 부평역 일대로 변화하였다. 근대의 산물이자 수탈의 상징인 철도의 개통과 함께 부평은 근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주요전시유물 l 경인선 공사 사진
주요전시유물 l 조선철도 연선요람
3-1. 일제의 한반도 지배와 경제수탈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자국의 경제안정을 위하여 한반도의 각종 생산물에 대한 개발과 판매 독점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1918년 일본의 쌀값 폭등을 계기로 일본 내 부족한 식량을 한반도에서 조달하려는 산미증식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미곡 증산을 위한 토지개량과 관개시설 개선이 핵심이었다. 경성과 인천의 중간에 위치한 부평은 경인철도의 개통에 따른 교통의 이점까지 더해져 일찍이 토지집적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1923년에는 부평수리조합이 창설되어 관개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일제에 의한 농업생산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소작료와 조합비 등 각종 비용을 조선 농민에 전가시켜 농민층의 몰락을 가져왔고, 조선인들은 미곡 반출 증가에 따른 만성적인 춘궁에 고통 받았다.
주요전시유물 l 주안염전 사진엽서
주요전시유물 l 부평수리조합 사진엽서
3-2.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국가총동원 체제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과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치르기 위해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인적, 물적 자원과 자금을 동원하였다.
또한 조선인 스스로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의 정신을 강화함과 동시에
조선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는 황민화정책(동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주요전시유물 l 국민총력
주요전시유물 l 황국신민서사
4.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일제는 만주 침략 이후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하였다.
장기화 된 전쟁으로 병력의 소모가 커지자 전면적인 국가 통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인적·물적·자금 동원을 규정한 전시수권법으로써,
50개조에 달하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이란 「국가총동원법」과 관련 법령에 근거하여 국가권력이 실시한
인적·물적·자금 동원 정책을 의미하며, 일제의 치밀한 관리 하에 정책적·조직적·집단적·계획적·폭력적으로 수행되었다.
주요전시유물 l 무운장구 조끼
주요전시유물 l 근로보국대 사진
주요전시유물 l 애국반회보
주요전시유물 l 공출보국 사기그릇
주요전시유물 l 일제경정제일정회 동유기 헌납 기념사진
5.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부평의 변화 _ 미쓰비시제강
히로나카상공 사택(이후 미쓰비시줄사택) 전경 사진
주요전시유물 l 미쓰비시 마크 접시
6.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부평의 변화 _ 인천육군조병창
일제는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각종 공출에 박차를 가하면서 1941년 부평에 인천육군조병창을 개창하였다.
인천육군조병창은 일제가 식민지에 건립한 무기 공장으로는 유일하며 부평에는 본부와 제1제조소가 그리고 평양에 평양제조소를 두었다.
주요 생산 무기는 소총과 총검이었다. 건설과정에서 각 지역의 주민들이 ‘근로보국’(노동으로 나라의 은덕에 보답한다)이라는 구호 아래 동원되어
공사장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조병창 건설의 결정을 전후하여 식민지 운영과 무기생산에 협조할 목적으로 국산자동차공업과 히로나카상공,
디젤자동차 조선제조소 등 일본 기업들이 부평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고 부평의 인구는 급증하게 되었다.
주요전시유물 l 토지매수 안내문
주요전시유물 l 인천육군조병창 기능자양성소 졸업증서
주요전시유물 l 인천육군조병창 제조 총검
7. 미쓰비시 사택의 철거와 보존
부평 2동에 남아있는 미쓰비시 사택은 크게 구사택지(동수북로 74 일원)와 신사택지(부평로 21 일원)로 구별된다.
구사택지의 건물은 일정한 배치의 규칙을 보이지 않고 부지에 맞춰 종횡으로 배치되었고, 공동시설인 공동목욕탕이 있었다. 이에 반해 신사택지의 건물은 장옥(長屋) 형태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어 줄사택이라고도 불리었다. 해방 이후 미쓰비시 사택은 미군에 접수되었다가, 1956년 토지소유권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어 1960년대에 대부분
일반에 불하되었다. 이후 거주민에 의해 확장과 변형을 거듭하였으며, 안전 문제로 인해 일부는 철거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2019년 주민공동시설 및 지역 행정복지센터
건설에 따라 신사택 일부가 철거되었다. 부평역사박물관에서는 철거가 예정되었던 신사택의 건축 부재를 수습하고 전문적인 보존처리를 거쳐 전시하고 있다.
주요전시유물 l 미쓰비시 사택지 출토 군용 철모
주요전시유물 l 미쓰비시 사택 건축 부재
8. 6.25전쟁 발발과 부평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부평지역은 그로부터 약 10여 일 만에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자 연합군은 김포비행장 방면과 서울 방면으로 나뉘어 진격하였다. 경인로를 따라 진격하던 연합군은 국군과 함께
원통이 고개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치른 후 부평역과 옛 조병창 인근에서도 산발적인 전투를 치루면서 북한군을 격퇴했다. 부평 지구 전투의 승리는 서울 수복 작전으로 이어졌다.
한편, 1953년 부평 미군부대 내에는 북한군 포로를 수용하는 제10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는데, 같은 해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 석방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주요전시유물 l 아사히 화보집
주요전시유물 l 6.25전쟁 당시 흑백 사진
9. 애스컴시티와 부평
부평에 주둔한 미군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학교의 재건과 상이용사들의 자활기구인 화랑농장의 건설 등 전후 복구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극심한 경제난과 실업난의 전쟁 후유증 속에서도 부평은 미군 기지로부터 파생되는 많은 일자리와 풍부한 물자를 제공받을 수가 있었다.
이렇듯 애스컴은 부평의 지역경제와 주민 생계를 지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편 애스컴 주변의 마을은 기지촌으로 변모하였다.
기지촌을 통해 미제 의약품 및 화장품, 고가의 가전제품 등이 흘러나오면서 부평에 ‘양키시장’이 생겨났다.
주요전시유물 l C-레이션
주요전시유물 l 신동아
주요전시유물 l 애스컴시티 한국인 노동자 급여명세서
주요전시유물 l 부평동초등학교 사진
10. 애스컴시티와 캠프마켓
부평에 미군이 진주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9월이다. 미군은 인천 상륙 후 곧바로 인천육군조병창 시설을 접수하였고,
이곳을 애스컴시티(ASCOM City: Army Service Command 미 군수지원사령부)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6.25전쟁의 발발로 철수하기 시작한 1950년 6월 27일까지 주한미군 부대에
물자와 식량을 보급하는 보급창의 역할을 하였다. 일시적으로 철수한 미군은 1951년 1.4후퇴 이후 인천지역 수복을 기점으로 재 주둔 하였으며, 보급창, 의무대, 공병대, 통신대, 항공대 등이
배치되었다. 이후 애스컴 시티는 애스컴 사령부가 자리한 캠프 마켓(Market)을 중심으로 캠프 그란트(Grant), 캠프 헤이즈(Hayes), 캠프 타일러(Tyler), 캠프 해리슨(Harrison),
캠프 아담스(Adams), 캠프 테일러(Taylor)로 구분지어 운영되었다. 1973년 6월 30일 애스컴시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베이커리 등 몇 개의 시설만 잔류하여 캠프마켓으로
축소 운영되었다. 2019년 12월 마지막으로 남은 캠프마켓이 반환됨에 따라 해방 이후부터 이어진 미군 주둔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주요전시유물 l 부평 애스컴 지도
주요전시유물 l 야전용 식기세트
11. 부평수출산업공단의 조성과 노동운동의 전개
1960~1970년대는 경제발전을 목표로 수출주도 공업화정책이 펼쳐졌던 시기이다. 정부는 수출산업공단의 조성을 계획하였고, 1969년 서울(구로)에 이어 부평지역에
수출공단을 준공하였다. 그 규모는 약 21만 2천 평이었으며 갈산동과 효성동, 작전동 일대가 해당되었다. 부평공업단지의 조성으로 부평의 무역활동이 본격화되었다.
1970년, 50개 입주업체 전원이 생산을 가동하여 3천99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함으로써 대한민국 굴지의 수출 공단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부평수출공단의 가동은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에 기여하였으나 노동자들의 처우나 노동환경은 좋지 않았다. 성장 속도에 비해 임금 인상 속도는 더디었고, 잔업과 철야작업으로 노동시간은 길어졌다. 결국 노동자들의 권익 회복을 위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는데, 1970년대에는 섬유, 방직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분야와 여성노동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것이 1980년대 들어서면서 중공업 분야와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주요전시유물 l 신진자동차 방문 기념품
주요전시유물 l 삼양라디오
주요전시유물 l 월간대화 / 어느 돌맹이의 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