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동(富平洞)
‘부평’이란 명칭은 1310년(고려 충선왕 2) 이전의 ‘길주목’을 ‘부평부’로 읍호를 바꿀 때 처음 등장한다. 원래 부평지역은 부평도호부 ‘부내면(府內面)’ 지역으로 도호부청사가 있었으므로 ‘부평읍내’라 하였고, 현재의 ‘계산동’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의 부평지역은 당시 부천군 부내면 ‘대정리(大井里)’로, 옛 부평읍내 지역은 부내면 ‘부평리’가 되었다. 1940년 제2차 인천부역 확장으로 이 지역은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때 각 리(里)의 명칭은 모두 왜식(倭式)으로 변경된 바, ‘대정리’는 ‘소화정(昭和町)’, ‘부평리’는 ‘대정정(大正町)’이 되었다. 광복 후 1945년 인천부고시 제62호에 따라 소화정은 부평동, 대정정은 계산동이 되었다. 1968년 인천시 북구 소속 부평동, 1995년 인천직할시가 광역시가 됨에따라 북구가 부평구와 계양구로 불리게 되었고, 여러 차례 통폐합을 거쳐 2006년 말 현재 부평1~6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부평’이란 지명에 대하여는 앞의 옛 고을의 유래에서 밝혔으므로 생략하거니와, 단순히 한자를 해석하여 ‘부유한(넉넉한) 벌판’의 뜻일 수 있지만, 한강 제방이 축조된 것도 일제강점기에 와서이므로, 고려시대의 부평들은 불모지였을 것이며, 해안에 제방이 본격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였다. 1842년(헌종 8)의 『부평부읍지』에 5개의 제언이 기재되어 있으나, 동소정면의 ‘혜기제(鞋機堤) 금폐(今廢)’라 한 것을 보면, 수원이 부족했던 것을 알 수 있고, 같은 문헌의 토산(土産) 조에도 쌀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부유’의 의미는 적합하지 못하다.
- 대정리(大井里)큰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이 우물은 지금의 우리은행 앞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부평역에서 부평읍으로 가는 행길 좌측으로 길 가까이에 있었으며 지금은 로터리로 들어가 없어졌다. 이 밖에 길 오른편 쪽으로 윗마을 동네 한가운데에 또 하나의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로터리 속으로 파묻혔다고 한다. 옛 지명에서 정(井, 丁, 亭)은 아무 의미 없이 단순히 마을의 이름을 짓기 위해 쓰는 후접요소(後接要素)의 기능을 갖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정리’의 ‘대정(大井)이나 대정(大丁)’은 반드시 어떤 우물과 관련이 없는 지명일 수 있다. 옛날에는 아랫마을이 대정리의 원마을로서 가장 큰 대촌(大村)을 이루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개 ‘큰 마을’이란 뜻에서 마을 이름을 대정리라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정리는 현 부평동의 옛 이름이다.
- 동수동(東樹洞)쌍굴다리를 지나 경인국도로 올라가는 중간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동수동에 산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이 부평6동으로 분동되기 전에 ‘부평2동 동수동’이었기 때문이다. 동수동은 현재의 부평동 대부분이 영조 때의 『여지도서』부터 ‘동소정면(同所井面)’으로서 흔히 ‘동수재이’로 불러왔다. 그러나 ‘동소’가 언제 ‘동수’, 또한 한자로 ‘동수(東樹)’라 표기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전거(典據)는 없다.
- 백운주택1970년을 전후하여 철로를 따라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름을 ‘백운주택’이라 하였다. 유래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부평사람들이 볼 때, 이 고개(산)에 구름이 하얗게 끼면 비가 오고, 그렇지 않으면 비가 아니 오고 하여, ‘백운(白雲)’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후에 생겨난 전철역 이름도 ‘백운역’이 된 것이다.
- 부영주택(府營住宅) 부평시장에 있는 사람들이 시장 가까이 시장 아래쪽에 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처음에는 인천부에서 지었기 때문에 ‘부영주택’이라 하였다.
- ① 부평삼거리·부평사거리경인국도와 마장길이 만나는 삼거리를 ‘부평삼거리’라 하나 지금은 부평공동묘지로 들어가는 삼거리까지 포함하여 부평삼거리라 한다. 이렇게 볼 때, 부평삼거리는 교차로라기보다는 마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시내를 복개하여 주안산 고갯길을 따라 만수동으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어 ‘부평삼거리’가 ‘사거리’로 바뀌었기 때문에 ‘부평사거리’라고 고쳐야 하나 지금까지의 관습대로 ‘부평삼거리’로 부른다.
- ② 산곡동입구(백마장입구)지금의 산곡4동을 ‘백마장’이라 부르기도 하거니와, 부평로(富平路)에서 원적산길(옛 천마로)로 꺾어지는 삼거리 일대를 ‘백마장입구’라고 불렀다. 이것은 1940년 4월 1일 당시 산곡리가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일본식 이름으로 백마정(白馬町)이 되었는데, 이 백마정이 백마장으로 바뀌고 그 입구가 ‘백마장입구’가 된 것이다. 백마장은 일본지명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산곡동 입구’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 삼능․삼능사택(三菱舍宅)·홍중사택(弘中舍宅)지금의 부평2동 전체를 ‘홍중사택’ 또는 일본말로 ‘히로나까’ 사택이라고 불러왔다. 이것은 지금의 동아아파트 남쪽 건너편 철로변에 모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가 현재 ‘부평공원’이 된 자리에 일제강점기에 홍중(弘中)이라는 군수공장이 있었고, 이 군수공장의 종업원 사택이 지금의 부평2동에 수십 채가 있었으므로, 이 사택을 ‘홍중사택’ 또는 ‘히로나까사택’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후 ‘히로나까’가 ‘미쓰비시(三菱)’로 바뀌므로 사택이름도 ‘히로나까사택’에서 ‘미쓰비시사택’ 또는 ‘삼능사택’으로 바뀌게 되었고, 삼능사택을 그 후 ‘삼능’으로 줄여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삼능’은 ‘삼능사택’에서 유래된 것으로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이다.
- 소반재·소반재말일제 때 삼능사택을 지을 당시 일인들은 현 감리교회가 있는 앞쪽에 최신식 높은 소방서를 지었다. 이 소방서가 높은 언덕 위에 있었으므로 이 언덕을 ‘소방재’라 부르게 되었고, 이 후 이곳에 마을이 조성되니 ‘소방재말’이 된 것이며, ‘소방재말이 소반재말’로 음운변화한 것이다.
- 신복동(新福洞)·고니새말·고니시말1930년대만 해도 부평에 인가라고는 원마을인 하촌에 약 30여 호, 부평역전(윗마을)에 10여 호, 수도사거리에 5~6 호, 그리고 신트리에 서너 집뿐이었다. 부평역과 수도사거리 동쪽 벌판은 거의 불모지였는데, 일본인 고니시(小西)라는 사람이 이 곳에 농장을 만들기 위하여 땅을 사고, 지금의 천주교 성당이 있는 근처에 직경 50m가 넘는 큰 저수지를 파고, 그 옆에서 살았다. 그 후 이 곳에 고니시와 더불어 대여섯 집이 모여 살게 되니 ‘고니시말(小西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후 이 마을의 유지 최규헌, 원유본, 유상목 등이 ‘고니새말’이란 이름이 못마땅하여 새로운 이름, 곧 ‘새로 복을 받는 마을’ 이란 뜻으로 ‘신복동’이라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일본인 이름에서 유래한 만큼 속히 청산해야 한다.
- 신부동(新富洞)일제강점기에 동사무소 자리(현재는 옛 북구청이 있던 근처)를 광복 후 교회로 사용한 적이 있어 ‘예배당촌’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인가가 증가함에 따라 주민들이 ‘새로이 부(富)해가는 마을, 또는 새로운 부평동’이라는 뜻으로 ‘신부동’이라 부르기로 하였으나, 지금은 잘 쓰지 않는다.
- ③ 신트리·윗신트리부평구청 뒤 근린공원의 남쪽 일대의 주택지를 일제강점기 초에 필사로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 ‘신대리(新垈里) - 신트리’라 불렀다. 이곳은 척박한 불모의 땅인데, 광복 후 차츰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20여 호의 마을이 되었고, 당시 사람들은 먼저 생긴 신트리를 ‘윗신트리’라 하고 나중에 생긴 근린공원 북쪽의 신트리를 ‘아랫신트리’(갈산동에 속함)라 구별하여 불렀다.
- 아랫마을·하촌(下村)·동수재이지금의 신일상호신용금고 부근에 위치한 ‘아랫마을’은 과거 대정리 시절 동수재이의 원마을로서 윗마을보다 규모가 큰 대촌(大村)을 이루었다. 로터리에 파묻힌 ‘윗마을보다 아래에 위치했기 때문’에 ‘아랫말’ 또는 ‘하촌’이라 불렀다. 하촌에서 동쪽 일대는 인가도 없는 농경지였으나, 그 후 도시화로 상가와 주택지로 변했다.
- ④아랫신촌·윗신촌도로변 신촌교(新村橋)에 가까운 쪽을 ‘아랫신촌’, 그 위쪽(서편)을 ‘윗신촌’이라 했다
- 윗마을윗마을은 부평역이 생김으로써 부평역 앞쪽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인데, 대정리의 원마을인 아랫말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에 ‘윗마을’이라 하였다. 이 후 윗마을이 대정리의 중심마을이 되었으나 1940년 이후 일제에 의한 도시계획에 따라 윗마을은 모두 로터리가 되었고, 대신에 로터리 아래(전 부평극장 위)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나갔다.
- 자가밭말‘자가밭말’은 윗마을 길 건너에 이웃해 있었으며, 현 계산동으로 가는 길에서 신촌방향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앞 부근에서 현 문화예식장 앞 부근까지로, 역시 모두 로터리와 신작로로 들어가고 말았다. 자가밭말은 이곳에서 ‘자갈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가밭’은 ‘자갈밭’이 음운변화한 것으로 추정되나 국어 음운규칙에서 ‘ㅂ’ 앞의 ‘ㄹ’탈락규칙은 없기 때문에 특이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 평화촌·다다구미지금의 롯데백화점 앞 원통천(元通川) 복개변 화교학교(華僑學校)가 있는 개울가 일대를 ‘다다구미’라 했다. 이곳은 부평조병창 확장공사 때, 하청업자인 다다구미(多田組)의 현장 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8·15광복을 전후하여 다다구미는 철수하고 빈터만 남아 있었는데 그 곳에 무허가 판잣집을 다닥다닥 붙여 짓고 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마을을 다다구미가 있었던 곳이라고 해서 계속 다다구미하고 부르게 되었는데, 1960년대 초반 경, 이곳에 사는 뜻 있는 분이 마을 이름을 ‘평화촌’이라 고쳐짓고 그렇게 부르기로 하였으나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 ⑤ 희망촌삼능사택에서 경인국도를 따라 부평삼거리쪽 도로상에 ‘원통이고개’를 만나게 된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남쪽(공동묘지 쪽)에 ‘작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고, 이 마을을 ‘희망촌’이라 한다. 이 곳은 1950년 경까지만 하여도 인가가 없는 골짜기였는데, 1960년 경부터 몇 가구가 살기 시작하게 되었다. 모두 앞날에 희망을 갖고 살자 하여 ‘희망촌’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한다.
- ⑥부평로(富平路)·김포로·신작로(新作路)부평역에서 부평읍내를 거쳐 ‘김포로 가는 도로’를 ‘김포로(金浦路)’라 하였다. 부평에서 김포로 가는 길이란 뜻이다. 1940년 부평지역이 인천부에 편입되고 조병창을 건설할 때, 그 배후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부평역전 일대의 도시계획을 수립, 현재와 같은 큰 도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초기에는 부평역에서 수도사거리까지 길을 넓혔는데 이 길을 새로 만든 길이라 하여 ‘신작로’라 불렀다. 광복 후, 이 도로를 ‘부평로’라 하고 계산동까지 크게 넓혔다. 부평구와 계양구가 나뉘었으므로 현재의 ‘부평로’는 부평역에서 경인고속도로까지를 뜻하게 되었다. ‘부평로’는 ‘부평의 중심도로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 ⑦경인로(京仁路)·경인도로·경인국도부평2동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이 길은 ‘서울-인천간을 연결하는 국도(國道)’이기 때문에 ‘경인로, 경인도로’ 혹은 ‘경인국도’라고 한다. 가톨릭성가병원 앞쪽으로 가는 것이 원래의 경인도로였고, 지금의 길은 새로 만들어 넓힌 것이다.
- ⑧경원로(慶源路)·신촌로(新村路)·원통로(元通路)옛 신촌로는 쌍굴다리오거리에서 부평역을 거쳐 부평삼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인데 부평역에서 신촌까지는 조병창을 건설할 때 만든 신작로에 해당한다. 그런데 최근에 인천시에서는 이 길을 원통로(元通路)와 연결시켜 ‘경원로’로 개칭하였다. 경원로는 남동구 경계를 지나 저 멀리 외암도사거리까지 연결되는데, 이것은 ‘인천의 옛 이름 경원군(慶源郡)’에서 딴 것이다. 한편 원통로는 부평서여중에서 부평도서관 앞을 지나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새로 생긴 큰 길로, (작은)원통고개를 넘는 길이므로 이름을 ‘원통로’라 하였던 것인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경원로’로 바뀌었다. 그리고 옛 신촌로인 부평삼거리에서 신촌사거리까지는 ‘마장길’이다.
- ⑨장제로(長堤路)·부흥로(富興路)굴다리오거리에서 계산동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부평5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길은 본래 부흥시장의 이름을 따 ‘부흥로’라 하였는데 최근에 김포 시계까지 연장하여 ‘장제로’로 바꾸었다. 장제로는 신라시대의 부평의 이름 ‘장제군(長堤郡)’에서 딴 것이다.
- ⑩동수로동수역에서 가톨릭성가병원 쪽으로 가는 옛 경인국도로, 옛 경인국도가 송신고가교를 넘어 부평시계를 따라 길주로 교차점까지 이르는 길과 합쳐서 ‘동수로’로 명명하였다. ‘동수로’는 예전에 대정리, 마분리, 항동, 구산동 일대가 ‘동소정면’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한때 부평6동을 부평2동 ‘동수동’이라 부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살린 것이다.
- 대정로(大井路)시장역오거리에서 굴다리오거리 사이의 길을 ‘대정로’라 한다. 부평역전 일대가 옛날에는 ‘대정리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살려 ‘대정로’로 하였다.
- 부원로(富元路)부원중학교가 있는 경원로와 원적산길 교차점을 연결한 도로로 부평1동과 산곡4동(산고3동 일부 포함)과의 경계를 이루고, 동아아파트, 주안장로교회, 욱일아파트로 이어지는 도로로 ‘부원로’는 ‘부원중학교의 이름’을 딴 것이다.
- 시장길부평역사거리에서 부흥오거리 사이의 길로 부평5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길은 ‘부평시장을 지나가기 때문’에 ‘시장길’로 하였다.
- ⑪원적산길·철마로(鐵馬路) 산곡동입구(옛 백마장입구)에서부터 산곡동을 거쳐 가좌동으로 넘어가는 길로서, 산곡동까지는 역시 일제강점기에 만들었다. 산곡동에서 가좌동으로 넘어가는 산은 본래 원적산(元積山)인데, 그 동안 철마산(혹은 천마산)으로 잘못 알고 이 관통로를 ‘철마산관통로’라 하고, 이 길 전체를 ‘철마로’라 이름하여 왔는데, 최근에 ‘원적산길’로 바로잡았다. ‘원적산길’은 ‘원적산을 넘어가는 길’이란 뜻이다.
- ⑫ 장고개길 부평로와 부원로 사이를 최근에 연결시킨 도로이다. 이 길은 장차 서구와 경계인 ‘장고개를 넘어 가도록’ 되어 있어서 ‘장고개길’이라 하였다. 동으로는 부흥오거리를 지나 부천시계와 만난다.
- ⑬부평역사거리부평지역이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된 후, 도시계획에 의하여 만들어진 매우 큰 로터리로서 옛 대정리의 중심 마을인 윗마을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부평역 앞에 있기 때문에 ‘역전로타리, 부평로타리, 부평역로타리, 부평역광장로타리’ 등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어 이름도 ‘부평역사거리’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다.
- ⑭굴다리오거리·쌍굴다리로타리·농협로타리부평역에서 서울방향으로 부평1동의 동경계(洞境界)를 이루는 곳에 있는데 위에 쌍굴다리가 있기 때문에 ‘쌍굴다리로타리’라 하였다. 그 후 로터리에 농협이 생김으로써 부개동 사람들은 ‘농협로타리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로터리 대신에 오거리가 되어, ‘굴다리오거리’라 부른다.
- 대정사거리장제로 상의 굴다리오거리 다음에 있는 사거리이다. 부평5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평동 일대가 예전에는 ‘대정리’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살려 ‘대정사거리’라 하였다.
- 동소정사거리경인로에서 부평 굴다리오거리로 꺾어지는 사거리로 예전의 ‘동소정면’을 좇아 ‘동소정사거리’로 하였다. 남쪽으로는 남동구와 바로 연결되는 ‘만월산터널’로 이어진다.
- ⑮동수(東樹 )역사거리·삼능사거리가톨릭성가병원 쪽으로 가는 옛 경인국도와 지금의 경인도로가 갈라지는 사거리를 삼능에 있는 사거리라 하여 전에는 ‘삼능사거리’라 불러왔으나, 이곳에 지하철 동수역이 생겨 ‘동수역사거리’라 부른다. ‘동수(東樹)’는 『여지도서』부터 ‘동소(同所)’였으나, 글자가 모두 바뀌었다.
- 문화사거리부평로에서 롯데백화점으로 꺾어지는 사거리를 ‘문화사거리’라 한다. 명신당이 있는 쪽으로 문화의 거리를 만들고 거기서 각종 ‘문화행사를 하기 때문’에 ‘문화사거리’가 된 것이다.
- 부흥오거리·부흥로타리부흥로타리도 ‘부흥시장 앞에 새로 생긴 로터리이기 때문’에 ‘부흥로타리’라 해왔으나 이곳에 로터리는 없고 오거리가 되어 지금은 ‘부흥오거리’라 부른다.
- ⑯신촌사거리경원로와 마장길이 만나는 교차로로 인근에 부인고가교가 있다. 이 일대가 신촌에 해당하므로 ‘신촌사거리’라 한다.
- 수도사거리부평대로(富平大路) 옆 부평동 439번지 일대에 상수도 가압 펌프장이 있다. 인천에 처음 상수도가 개설되어 노량진 정수장에서 인천 송림동 수도국산까지 송수되는 5백미리 상수도 관이 이곳을 지나갔는데, 이 수도관 지상에는 4미터 폭의 도로가 개설되었다. 그래서 이곳이 옛 김포국도와 4거리를 이루게 되었으며, 인가도 없던 빈터에 1930년을 전후하여 인가가 생기기 시작하여 마을이 되니, 이곳을 ‘수도사거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 ⑰부평역전·역전·역전앞부평역은 1900년 9월 18일에 건설되었으며, 당초에는 조그마하였으나, 현재에는 경인전철, 인천지하철1호선과의 환승역으로서 지하 4층, 지상 4층의 큰 건물로 웅장하게 서 있다. 부평역이 생겨서 자연히 역 앞에 상가, 인가가 들어서게 되니 이곳을 ‘역전’ 또는 ‘역전앞’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윗마을과 같이 로터리에 파묻혀 없어진 상태다.
- 백운역경인전철 부평역과 동암역 사이 백운주택 인근 ‘백운고가교 밑에 개설한 전철역’이다.
- 부개역경인전철 부평역과 부천의 송내역 중간 ‘부개동’에 개설한 전철역으로, 역이 신설됨에 따라 이 인근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 시장역옛 북구청 입구 사거리에 인천지하철1호선 역이 생겼는데, ‘부평시장이 가깝다’ 하여 이 역 이름을 ‘시장역’으로 하였다.
- 시장로타리시장길과 대정로가 만나는 교차로인데, 자유시장에 연이어 길 건너에 부흥시장이 생기고, 시장 사이에 있는 로터리이므로 ‘시장로타리’로 부른다.
- ⑱남부고가교이 고가교는 옛 신촌로에서 삼능으로 가기 위해 철로 위로 건설된 고가교로 1978년에 준공된 것으로 최근에는 차가 다니기에 너무 협소해서 폐하고, 2006년 부평공원 위로 새 고가교를 가설하였다. 부평의 남쪽과 연결되므로 ‘남부고가교’라 하였다.
- 부인고가교(富人高架橋)·부안고가교 백운역 위에 있었으나 역을 인천쪽으로 옮겨 역사와 동서로 100여m 떨어진 신촌에서 부평삼거리 쪽으로 전철길을 넘어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고가교(高架橋)를 말한다. ‘부평과 인천을 잇는 고가다리’라 해서 ‘부인고가교’라 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부안고가교로’ 잘못 쓰고 있어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다.
- 부흥시장·새시장1960년대 이후, 자유시장 길 건너에 크게 시장을 만들고 ‘크게 잘 되라는 뜻’으로 ‘부흥시장’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부흥시장 전신을 ‘새시장’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새로 만든 시장’이므로 붙인 이름이다.
- 공설시장 광복 직후 인천시에서는 부평지구 공설시장을 세우기로 하고, 지금의 북부교육청 북쪽 주택지대를 선정하여 구획정리를 하고 상가를 조성하여 ‘부평공설시장’이라 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상인들이 입주하였을 뿐,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반면 길 건너 부평4동 현 명신당(明信堂) 뒤편으로 상인들이 모여 상가를 조성하고, 점차 번성하였고, 후에 ‘자유시장(自由市場)’이 되니 공설시장은 주택가로 변했다.
- 백마교(白馬橋)부평로에서 원적산길로 꺾어져서 산곡동 입구, 부평1동 62-11에 있다. 이것은 원통천(元通川)을 건너기 위해 가설된 것으로서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백마교’는 옛 ‘백마장 입구에 있는 다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신촌교(新村橋)부평3동 270번지에 있으며, 원통천을 건너는 다리로 ‘신촌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신촌2교‘신촌2교’는 부평1동 315~3번지에 있는 것으로 조병창을 건설할 때 원통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것인데 지금은 경원로(옛 신촌로)와 원적산길을 잇는 대로로 확장 되었다. 신촌(부평3동)과 경계하고 있으며, 그 위쪽 신촌에 있는 것이 ‘신촌교(또는 신촌1교)이기 때문’에 이 다리는 ‘신촌2교’라 명명한 것이다.
- 원통산(元通山)『여지도서』에는 원통산이 기재되지 않았고, 1842년, 1871년의 『부평부읍지』의 지도에 부평 서남 끝에 원통산(元通山)을 기재했다. 그러나 앞의 시기에 작성된 『인천부읍지』에는 당해 산에 각각 주안산(朱雁山), 원통산(元通山)이라 기재했다. 어느 산이 원통산인지 정확하게 전해오지 않는다. 지금의 약사사(藥師寺)가 있는 주안산(朱雁山)을 원통산으로 부르기도 하고, 지금의 맹아학교 뒷산을 원통산으로 보기도 하지만, 지도상에서 볼 때, ‘주안산’을 ‘부평에서 원통산’으로 부른 듯하다.
- 당산부평남부역으로 나가면, 대련연립주택 서쪽 끝 산 정상 부근에서 ‘동제를 지내곤 하였기 때문’에 ‘당산’이라 한다. 그 후 일본인들이 이 위에 신사(神社)를 짓고 강제로 참배케 한 아픈 역사도 있었다.
- ⑲원통고개 (元通峴)·원통이고개부평삼거리에서 간석오거리에 이르는 고개를 ‘원통고개’ 또는 ‘원통이고개’라 부르는 바, ‘원통산을 따라 명명’된 것이다. 이 원통고개에 대하여 몇 개의 전설이 있다.
예로부터 삼남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는 대동미(大同米)의 운송을 험난한 강화 ‘손돌목’을 지나 한강을 거슬러 경창(京倉)으로 보내는데 항상 손돌목을 지나기가 위험하여 이 뱃길을 단축하고자 굴포(掘浦)를 착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고종 때 권신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가 먼저 구상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또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김안로(金安老)가 한강에서 인천 북항을 잇는 수로를 뚫는 굴포작업을 시작하여 한강에서 부평 뜰을 거쳐 원통이고개 앞까지 이르렀다 한다. 그런데 이 고개(산)가 전부 암반이므로 뚫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니 그간 ‘큰 고생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 원통’하다고 하여 ‘원통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가 새로이 도읍지를 물색할 때, 무학대사가 부평에 와서 살펴보니 계양 명산에 한강을 끼고, 들이 넓어 도읍지에 적격일 뿐 아니라, 산골짜기도 꼭 백 개라 돌아가 이성계에게 그 사실을 품계 하였다. 그런데 그후 이성계가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와서 자세히 세어보니 산골짜기가 한 골이 모자라는 99개밖에 안되어 그만 도읍지를 단념하게 되었다. 그 연유를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이 원통이에 봉우리가 있어 본래 골이 깊었는데 이것이 없어지고 얕은 언덕으로 바뀌어 있었으므로 “아! 원통하고 원통한지고! 봉우리가 언덕으로 변하다니!” 하고 탄식하게 되어, 이 때부터 이 산을 ‘원통산’이라 부르고 또 이 고개를 ‘원통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전설도 산이름, 곧 원통산에 이끌려 그럴듯하게 윤색된 것으로 추정된다. 것이다.
『대동지지』 김포 편에 “최이와 조선 중종조의 김안로가 도랑을 파서 바다와 통하게 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조가 ‘개경이 아닌 서울로 통하는 물길을 뚫을 까닭이 없고’, 김안로도 ‘사전에 지형조사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굴포천 하류는 유속이 완만한 곡천(曲川)이므로,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굴포 공사를 했던 것을 후대에 산이름 원통산과 함께 윤색한 듯하다.
- 작은원통이고개·원통이고개부평3동에서 철로 변을 따라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작은원통이고개’이다. 그런데 십정동 사람들은 이 고개를 그냥 ‘원통이고개’라 하기도 한다. 마을의 전설로 “일제강점기에 경인철로를 놓기 위하여 산을 폭파할 때 이곳에 묻혀 있던 장사의 목이 잘려나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장사는 삼일만 더 있었으면 사람이 되어 나갈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삼일을 참지 못하고 그만 죽게 되어 매우 원통하고 안타깝게 되었다” 하여 ‘원통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작은원통고개’는 ‘본래의 원통고개가 경인도로상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⑳부평공원신촌과 남부고가교 사이에 신설한 공원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군수공장, 광복 후에는 국군부대가 주둔하던 터에 부평 제일의 ‘부평공원’이 조성되어 구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원통천(元通川)굴포천의 상류를 흔히 ‘원통천’이라 한다. 원통천의 발원지는 부평공동묘지 내에 있는 칠성약수(七星藥水)와 부령약수(富嶺藥水)가 있는 곳이다. 현재는 상당부분이 복개되어 롯데백화점이 있는 쪽은 도로와 주차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원통천’의 ‘원통’은 ‘원통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1842년, 1871년 작성된 옛 『부평부읍지』들에 원통산의 한자 표기가 모두 ‘으뜸 원(元)’으로 되어 있다.
- 큰우물현재의 우리은행 앞 부근에 직경 5m나 되는 ‘큰 우물’이 있어 근처의 모든 사람들이 이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하여 면 이름이 ‘동소정면’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전언에 의하면 윗마을 가운데에 큰 우물이 또 있었고, 윗마을에서는 보통 그것을 ‘큰우물’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 쌍굴다리‘쌍굴다리’는 부평역에서 서울방향으로 부평1동의 동경계(洞境界)를 이루는 곳에 있는 ‘철로 다리’이다. 부평역 방향에서 경인도로로 넘어가는 본래의 길이 있었으나, 길이 좁고 또 위험하여 이곳에 철길 밑으로 굴다리를 크게 파고 서울로 가는 새 길을 놓았다. 그런데 이 굴다리는 너무 폭이 넓어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으므로 ‘쌍굴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쌍굴다리’로 부르게 된 것이다.
- 부평공동묘지부평2동 ‘큰골’ 안에 있으며, 인천에서 제일 큰 시립공동묘지이다. 부평에 있기 때문에 ‘부평공동묘지’라고 부른다.
- 부평조병창(富平造兵廠)지금의 부평1동 동아, 대림, 욱일아파트 자리와 산곡3동과 4동의 미군부대, 현대, 우성, 동남, 삼일아파트 지역, 그리고 화랑농장이 들어서 있는 일대를 ‘조병창’ 또는 ‘부평조병창’이라 했는데 이것은 일제 때 이 지역이 무기를 제조하던 군수기지였기 때문이다. 광복을 맞이하여 이 조병창 자리 일대에 미군 ‘에스캄’이 들어와 주둔하였으며, 이후 미군기지가 축소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아파트단지, 학교가 건설된 것이다.
산곡동(山谷洞)
현재의 ‘산곡동(山谷洞)’은 1914년 개편 때, 부천군 마장면 ‘산곡리’였고, 일제강점기 초에 필사로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산곡리-뫼골말’로 기록되어 있다. ‘뫼끝말’로도 불러왔는데, ‘원적산의 남쪽 줄기가 휘어돈 골 끝에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산곡리는 예전 방리(坊里-면.리) 시절 산곡동의 명칭이었다. 2006년 말 현재, 산곡동은 1~4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 ①뫼끝말·뫼꼴말·뫼꼬지·뫼꽃말[山花村]·꽃밭골[花田谷]‘뫼끝말’은 마을 서쪽 뒷산인 ‘원적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흘러내린 끝에 마을이 형성’되어 붙인 이름이다. ‘뫼끝말’을 ‘뫼꼴말’이라고도 하는데 ‘뫼꼴말’은 뫼의 남쪽은 작은 골짜기이고 북쪽은 큰 골짜기를 이룬 곳에 마을이 있어 ‘산골짝의 마을’이란 뜻으로 ‘뫼꼴(산골)말 혹은 산곡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뫼꼬지’는 ‘뫼끝말’이 ‘뫼의 끝’이기 때문에 ‘뫼의 곶(串)이 되므로 뫼꼬지’가 되었다.
‘뫼꽃말’에서 ‘꽃’의 중세국어가 ‘곶’이므로 ‘뫼곶말>뫼꽃말’의 자연스런 변천을 겪게된 것이지만 ‘꽃〔花〕’의 뜻은 아니며, ‘꽃밭골’은 새롭게 조어(造語)된 것으로 원래의 지명과 거리가 있다.
- 검정사택·도깨비시장검정사택은 ‘집 벽을 콜탈을 먹인 종이로 지은 집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도깨비시장 일대’를 말한다. 도깨비시장은 옛날 미군부대 유출 물건을 팔 때 단속이 나오면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여 도깨비시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 백마장(白馬場)지금의 백마극장 남서쪽 일대의 사택 밀집지대를 흔히 ‘백마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백마장은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을 왜식 백마정(白馬町)이라 했던 것이 변천한 것이다.
- ②양성골·안성굴·성안골·성안굴현재 한일초등학교가 자리한 골짜기로 그 생김이 마치 ‘성을 쌓아 놓은 듯’하여 ‘성안골’ 또는 ‘성안굴’하던 것이 반대로 ‘안성골’이 된 것이며, 이것이 후에 ‘양성골’이 된 것이다.
- ③장끝말[場末村]장말고개 동쪽 밑에 약 20여 호의 마을을 ‘장끝말’이라 하였다. ‘장끝말’은 ‘마장뜰의 끝’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1935년 경 일제가 이곳에 조병창을 확대하기 위하여 수용령을 내리고 징발해서 마을이 없어졌고, 지금 이곳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 큰골·꽃뫼초큰골뫼끝말과 마재이(청천동) 사이에는 원적산에서 흐르는 큰 시내가 있어(이것은 청천이 아님) 이것을 따라 올라 가면, 산 중턱에 넓은 벌판이 나오는데 이곳을 ‘넓은 골’이라 ‘큰골’이라 불렀다. 그리고 ‘꽃뫼초큰골’이란 ‘산곡동에 있는 큰골’이란 뜻이다.
- ④화랑농장지금의 현대아파트와 부광고, 약수터가 있는 ‘언덕 넘어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화랑농장’이라 부른다. 화랑농장은 1950년대 초에 상이용사 출신이며 제2대 시의원을 지낸 김국환과 진상구 등이 이곳에 농장을 설치하고 이름을 ‘화랑농장’이라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 ⑤안남로(安南路), 백마로(白馬路)산곡2동과 산곡4동을 경계로 하는 도로를 말한다. 본래는 ‘백마장(산곡동)에 있다 하여 백마로’라 불러 왔으나 최근에 동수역사거리까지(현재는 산곡남중학교까지 밖에 길이 나지 않음) 연결시켜 ‘안남로’로 개칭하였다. 안남로는 ‘부평의 옛 이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에서 따 온 것이다.
- ⑥경원로2001아울렛 앞을 지나가는 길을 원래 ‘신촌로’라 하였는데 최근 이 길을 ‘원통로와 연결시켜 경원로’로 개칭하였다. 경원로는 남동구 경계를 지나 저 멀리 외암도사거리까지 연결되는데 이것은 ‘인천의 옛 이름 경원군(慶源郡)’에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 ⑦원적산길‘산곡동입구(옛 백마장입구)에서부터 산곡동을 거쳐 가좌동으로 넘어가는 길’로서 산곡동까지는 일제강점기에 만든 길이이지만 4차선으로 확장하였다. ‘원적산길’은 ‘원적산을 넘어가는 길’이란 뜻이다.
- 장고개길서구 경계인 ‘장고개’를 넘어 서구와 연결되는 길이기 때문에 ‘장고개길’이라 하였다. 이 길은 동으로는 시장오거리, 부흥오거리를 지나 부천시계에까지 이른다.
- 마장길·청천로(淸川路)산곡3동을 관통하는 길로 부평삼거리에서 신촌사거리, 원적산사거리를 지나 새벼리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새로 생긴 큰 길이다. 이 길은 지금까지 청천동을 관통하는 길이라 하여 ‘청천로’라 했다가 ‘마장길’로 바꾸었다. 이것은 옛날에 산곡동, 청천동, 효성동 일대를 ‘마장면(馬場面)이라 하였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 마장사거리마장길과 길주로가 교차하는 사거리로 마장뜰에 있다 하여 ‘마장사거리’로 하였다.
- ⑧부평전화국사거리안남로와 원적산길이 만나는 사거리를 말하는데 ‘인근에 부평전화국’이 있어 ‘부평전화국사거리’라 한다.
- ⑨산곡사거리안남로와 길주로가 만나는 사거리로 ‘산곡동에 있다’ 하여 ‘산곡사거리’로 하였다.
- ⑩원적산사거리마장길과 원적산길이 만나는 사거리로 ‘원적산의 이름을 따서 원적산사거리’로 하였다.
- ⑪원적산(元積山)옛 읍지들의 지도에 의하면, 부평부(富平府) 남쪽 15리에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북쪽으로는 안하지고개에서 천마산에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장고개에서 원통산으로 이어진다. 이 산줄기는 옛 마장면과 석곶면을 경계한 산이고 지금도 부평구와 서구를 경계하는 산이다.여지도서이후 옛 부평부 읍지들에 모두 같은 한자인 원통산(元通山)로 기록되어 왔다. 한 때 부평 지도, 행정적으로 철마산, 천마산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바로잡았다.
- ⑫서산(西山)화랑농장 서쪽에 있는 산을 마을 사람들이 ‘마을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산’이라 부른다. 함봉산의 북쪽 줄기이다.
- ⑬함봉산부평도서관 뒷산을 함봉산이라 한다. 옛날 이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다. 따라서 함봉산이란 호랑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산이란 뜻인데 이것은 한자 풀이일 뿐 확실치 못하다. 함봉산을 호봉산(虎峰山)으로도 부르는데, ‘함’자가 ‘호(虎)변’에 ‘함(咸)’을 쓴 글자인 바, 이 글자를 호(虎)자로 잘못 읽은 결과다. 원통천은 ‘원통산에서 발원한 시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청천(淸川)큰골에서 뫼끝말과 마재이 사이로 흐르는 이름 없는 이 개울을 청천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사오십년 전만 해도 이 개울물이 아주 맑았기 때문이다.
- ⑭구루지고개[九老峴]·구르지고개·서산고개[西山峴]화랑농장에서 서쪽 산을 넘어 서구 ‘가좌동이나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구르지고개는 6·25전쟁 이후, 생선장수나 소금장수 등이 많이 넘어 다녔는데, 경사가 급하여 그만 ‘굴러 넘어지지’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일제 때 이 산에 군용으로 굴을 많이 파 놓았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이 산에 굴이 서너개 남아 있는데 얼마 전까지도 새우젓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자 구로현(九老峴)은 구르지고개를 억지로 한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산고개’는 ‘마을 서쪽에 있는 산을 넘는 고개’, 또는 ‘서산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 밤재·밤고개[栗峴]·밤나무고개뫼끝말 남쪽 지금의 마곡초등학교 남쪽 골짜기를 ‘밤나무골’이라 하는데 이 골짜기로 넘어 들어가는 작은 고개가 ‘밤나무고개’이다. 밤나무골에 있는 고개이기에 ‘밤재, 밤고개, 혹은 밤나무고개’라 한 것이다.
- ⑮장끝고개[場末村]·장고개·장현(場峴, 長峴)원적산 줄기가 남으로 뻗어 원통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장끝고개’가 있다. 효성동에서 남쪽으로 저 멀리 부평조병창까지의 초지 무성한 넓은 벌판을 옛날에는 ‘마장뜰’이라 불렀는데 장끝고개는 이 ‘마장뜰의 끝’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장고개’는 ‘장끝고개’의 준말이지만, 장현(長峴)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장끝고개는 부평에 있는 고개 중에서 가장 낮은 고개였기 때문에 1906년 인천에 수도국을 설치할 때 노량진 수원지에서 송현동 배수지까지 구경 500mm나 되는 수도관을 이 고개를 넘어 설치 공사하였다.
- 백마2교산곡4동 135번지에 위치한 이 다리는 본래 조병창안으로 흐르던 원통천 위에 놓인 다리로 원적산길에 있다. 백마2교의 ‘백마’는 ‘백마장’에서 유래되었으며, 지금의 ‘원통천 위에 놓인 다리가 백마교’이기 때문에 ‘백마2교’라 한 것이다.
- 밤나무골뫼끝말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밤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마장뜰[馬場坪]·마쟁이들새별이에서 남쪽 저 멀리 부평조병창까지의 초지 무성한 넓은 벌판을 ‘마장뜰 또는 마쟁이들’이라 하였다. 이곳이 옛날에 말을 기르던 말 목장이었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 전해오나 읍지들의 기록은 없다.
청천동(淸川洞)
청천동은 『호구총수』부터 마창면 청천리로 편제되어 있었고, 그후의 부평부 읍지들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지지자료 』에는 마장면 ‘청천리-말근내’라 기록되어 있다. 원적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맑았기 때문에 ‘맑은내’ 또는 ‘청천’이라 불러 왔고, 이 청천 시내 인근의 마을을 ‘청천리’라 하였다. 청천동은 2006년 말 현재 1·2동으로 나뉘어 있다.
- 마제이·마장뜰·맑은내·청천리지금의 ‘효성동, 청천동, 산곡동’ 일대를 옛날에는 ‘마장뜰’ 또는 ‘마제이’라 했다. ‘마장뜰’은 이곳이 억새풀만 우거진 초지였기 때문이며, 고려시대부터 말을 사육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장면(馬場面)의 사무소’가 ‘청천리’에 있었기 때문에 ‘마장뜰’ 하면 주로 ‘청천리’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마장면을 ‘마제이’라고도 부른 것은 우리말에서 ‘ㅇ’을 탈락시키고 쓰는 관습, 곧 ‘독정→독제이, 완정→완제이’ 등에서 볼 수 있다.
- 양계마을마제이[淸川里]에서 ‘안하지고개’ 사이에 큰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곳이 옛 안하지(雁下池)였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원적산 골짜기로 올라가면 산 중턱에 넓은 산골마을이 나온다. 지금의 청천동농장이 있는 일대로서 1961년 12월부터 이곳에 음성나환자를 집단 수용하여 양계업(養鷄業)으로 생계를 유지하므로 ‘양계마을, 큰골, 양계골’로 불렀다.
- ①부평로대우자동차 앞의 큰길로 갈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부평역에서 계산동으로 뻗은 부평에서 제일 큰 주도로’이기 때문에 ‘부평로’라 한다.
- ②경인고속도로·국방도로(國防路)·인영도로(仁永道路)‘경인고속도로’는 일제강점 말기에 조병창을 조성하면서 소위 국방도로로 건설한 것을 박대통령 시절 확장하여 우리나라 ‘제1호 고속도로’가 된것이다. 초기에는 이 도로를 국방도로라 불렀으며, 또 인천과 영등포를 연결하는 도로였기 때문에 ‘인영도로’라 하기도 하였다.
- ③안남로(安南路)대우자동차 뒤쪽에 있는 도로로 본래는 백마장에 있다 하여 ‘백마로’라 불러 왔으나 최근에 동수역사거리까지 연결시켜 ‘안남로’로 개칭하였다. ‘안남로’는 ‘부평의 옛 이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에서 따 온 것’이다.
- ④길주로(吉州路)‘대우자동차 공장 남쪽으로 부평경찰서 앞을 지나가는 도로’를 ‘길주로’라 한다. 이 도로는 동쪽으로 부천시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서구경계를 넘어 염곡로 교차점까지 이어질 예정인데, 고려 충렬왕 때 ‘부평을 길주라 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을 살려 ‘길주로’라 하였다.
- 갈월로(葛月路)‘서구 경계에서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삼산동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청천동에 있으나 갈산동으로도 통과해 ‘갈산동의 옛 이름’인 ‘갈월리’를 좇아 ‘갈월로’로 하였다.
- ⑤부평IC사거리‘경인고속도로 진입로 직전에 있는 사거리’이므로 ‘부평IC사거리’이다.
- ⑥새벼리사거리‘마장길과 갈월로가 만나는 사거리’로 청천1동에서 효성동으로 넘어갈 때 고속도로 직전에 있는 사거리이다. 예전에는 ‘효성동’을 고유어로 ‘새벼리라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살린 것이다.
- 수출공단오거리‘안남로와 청천로가 만나는 오거리’로 대우자동차공장을 비롯해서 이 일대가 ‘수출공단이기 때문에 수출공단오거리’라 명명했다.
- 청수사거리‘마장길과 청천로가 만나는 사거리’이다. 청천로는 청천을 복개한 도로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살려 ‘청수사거리’라 하였다.
- ⑦청천사거리마장로에 있으며 청천2동 사무소를 끼고 돌아 대우자동차공장 북측에 있는 복개도로와 연결되는 사거리이다. ‘청천동에 있다’하여 ‘청천사거리’로 하였다.
- 효성굴다리사거리‘안남로와 갈월로가 만나는 사거리’로 청천2동에서 효성동으로 갈 때 고속도로 직전에 있는 사거리이다. ‘고속도로 밑으로 지나가는 굴다리가 효성굴다리이기 때문’에 사거리 이름을 ‘효성굴다리사거리’라 하였다.
- ⑧장수산·깎은산·깎까산·장수산헬기장원적산의 한 줄기가 청천1동의 뒷산을 이루고 있는 바, 이것은 현 청천초등학교 뒷산으로 ‘장수산, 깎은산, 깎까산’ 또는 ‘헬기장’이라 부른다. 깎은산이나 깎까산은 일제 때 군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이 산봉우리를 평평하게 깎아 놓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6·25전쟁 후 이곳을 미군들이 헬기장으로 사용해 헬기장으로 부르게 되었고, 깎은산의 원봉우리를 최근에 체육시설을 하고 선의로 장수산(長壽山)이라 부르고, 정자도 지었다.
- 눈다리개천[黃魚川]·윤다리개천예전에는 맑은내가 현 대우자동차 공장 안으로 내려가다가 원통천과 합류하였는데 특히 ‘사근대리 일대의 개울’을 ‘눈다리개천’이라 하였다 하나 고유어, 한자어가 일치하지 않고, 의미도 알 수 없다. ‘윤다리개천’은 ‘눈다리개천’의 음운변화로 파생된 지명이다.
- ⑨맑은내, 청천(淸川)원적산과에서 발원해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예전의 ‘시냇물이 맑기 때문’에 ‘맑은내 또는 청천’이라 불렀다.
- ⑩청천교서부간선수로를 건너는 다리로 안병원 앞쪽에 있는데, 최근에 지하철공사로 크게 개축되었다. ‘청천동에 있으므로 청천교’라 명명했다. 그런데 이 다리는 현재 갈산동에 있는 서부2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갈월동으로 넘어 가는 다리로 청천동으로부터 흐른다 하여 청천교라 하였다.
- 제1효성교·제2효성교·제3효성교청천동에서 효성동 쪽으로 경인고속도로 밑으로 지나가도록 만든 굴다리가 셋이 있는데, 그 중 청천1동에 있는 것이 ‘제1효성교’이다. 경인교속도로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 지역이 ‘효성동에 속해 효성교’라 하였다. 그 다음 동쪽 것을 ‘제2효성교’, 제일 동쪽의 다리를 ‘제3효성교’, 또는 ‘효성굴다리’라 부른다.
- 효성차도육교청천동에서 효성동 쪽으로 경인고속도로를 넘어 가도록 만들어진 다리이다. 부평구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효성동에 속해 ‘효성차도육교’로 한 것이다.
- ⑪신노개들[神路野]·신너게들대우자동차공장 부지 일대로 예전 이곳은 천수답이었기 때문에 ‘신노개들 신너게들’이라 하였다고 말하는데, 그 유래는 확실치 못하고. 하늘의 비와 신을 연관시켜 붙인 이름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갈산동
1789년 작성된 『호구총수』방리에 부평부 서면 소속의 ‘갈월리(葛月里)’가 있었고, 1914년의 『조선전도부군면리총람』에도 부천군 소속의 같은 이름으로 편제되었으나, 1946년 새로운 동을 편제할 때, ‘갈산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2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지금의 정수장 자리가 갈산이라고 하는 바, 갈산은 산 전체가 ‘칡으로 뒤덮여 어찌나 오래 묵고 굵은지 마을 사람들이 집을 짓는데 칡대들보’를 쓸 정도였다고 전해온다. 이 칡넝쿨이 우거진 갈산에 비추는 밝은 달의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어 ‘갈산명월(葛山明月)’이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갈월, 또는 갈월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의 ‘갈산’이 구릉에 지나지 않지만 ‘주변에 비해 높기 때문’에 붙인 지명으로 추정된다. ‘갈’은 ‘낱가리, 터주가리, 짚가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높다’의 뜻을 가진 고대어의 화석이며, 우리나라 산천에 지천인 칡을 마을이름에 쓴 것은 대개는 전설로 윤색된 경우가 많다. ‘갈(葛)’계의 지명은 칡과 별 관계가 없이 ‘높다’의 뜻으로 지명에 사용되어 왔는 바, 검단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215m)인 ‘가현산’을 전통적으로는 ‘가린산’이라 부르는 데서 ‘갈’의 의미를 알 수 있다.
2006년 말 현재, 갈산동은 1· 2동으로 분동되어 있다.
- ①아랫신트리지금의 여성회관 동쪽, 근린공원 북쪽이다. 본래 근린공원 남쪽 일대를 ‘신트리’라 불러 왔다. 이곳에서 약 100m쯤 북쪽인 부평동과 갈산동의 경계 부근에 논을 일구기 위한 넓은 뚝이 있었고, 그곳에 한두 채, 인가가 늘기 시작해 약 20호의 마을이 생겼다. 그리하여 먼저 생긴 신트리를 ‘윗신트리’라 하고 나중에 생긴 곳을 ‘아랫신트리’라 하여 구별하여 불렀다.
- 새갈일제강점기 말 경인고속도로의 전신인 소위 국방도로를 건설할 때, 갈산동 마을 북쪽 등성이의 흙을 파다가 썼다. 이 토취장(土取場) 자리가 수 천 평이나 되었는데, 광복 후 이곳에 집을 지어 수십 호의 마을을 이루니 ‘새로 생긴 갈월리’라 해서 ‘새갈’이라 하였다.
- 부평로청천2동과 갈산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부평역에서 계양구로 통하는 부평을 대표하는제일 큰 ‘주도로’이기 때문에 ‘부평로’라 명명했다.
- ②주부토길·작전로(鵲田路)부평에서 계산동으로 가던 옛 김포로(金浦路)로 갈산동, 작전동을 관통해 ‘작전로’라 불렀으나, 지금은 ‘주부토길’로 바꾸었다. 주부토(主夫吐)란 고구려시대에 부평을 ‘주부토군’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것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 장제로(長堤路)굴다리오거리에서 계산동 쪽으로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로 삼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길은 본래 부평동에 있는 부흥시장의 이름을 따 ‘부흥로’라 하였었으나, 최근에 김포시계까지 연장하여 ‘장제로’로 바꾸었다. 장제로는 부평의 신라 때 고을이름인 ‘장제군(長堤郡)’에서 딴 것이다.
- 청천로청천1동 인항아파트에서부터 청천을 복개하여 만든 도로로, 갈산동을 관통하여 삼산동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이며, ‘청천(맑은내)’을 좇아 ‘청천로’로 하였다.
- ③갈월사거리장제로와 갈월로가 만나는 사거리로 갈산동의 옛 이름인 ‘갈월리’의 이름을 따서 ‘갈월사거리’라 하였다.
- ④북부소방서앞삼거리북부소방서 앞에 있기 때문에 ‘북부소방서앞삼거리’라 한다.
- ⑤굴포천(掘浦川)굴포천은 ‘흙을 파낸 하천’란 뜻으로 ‘대교천 하류 김포시 지역(벌말에서 한강까지)으로 지반이 높아 한강까지 통수가 잘 되도록 깊이 뚫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벌말에서 목수통까지 꾸불꾸불한 하천을 일직선으로 곧게 뚫어서 이를 ‘직포(直浦) 또는 직천(直川)’이라 했던 것인데, ‘이들 하천 전체를 굴포천’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다 같은 직포인데 한다리[大橋]가 있는 곳을 대교천(大橋川)이라 불렀고, 벌말 근처의 양천지역을 ‘북포(北浦)’라 하였다. 따라서 ‘대교천이나 직포, 북포, 굴포천’은 다 같은 ‘굴포천’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갈산동에 있는 이 하천은 굴포천의 여러 개 큰 지류 중의 하나지만, 굴포천보다는 ‘원통천’이 타당하다. 이 원통천은 본래 서부간선수로를 따라 더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으나, 지금의 여성회관 뒤로 흐르도록 물길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 굴포1교·굴포2교·굴포3교·굴포4교여성회관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굴포천(원통천)을 넘는 다리 네 개 중 제일 서쪽에 있다. 서울-김포시의 경계인 굴포천을 넘는 다리가 원래의 ‘굴포교(판개다리·팽개다리)’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굴포천을 넘는 다리를 ‘굴포1교’라 하였고, 주부토길을 넘는 다리는 ‘굴포2교’ 차례로 동쪽으로 가면서 ‘굴포3,4교’로 부른다.
- ⑥사근다리사근다리는 현재 부평세관 근처 동쪽에 있었다. 전에는 갈산동에서 부평역으로 이어지는 김포국도(부평로)가 한강토지개량조합의 서부용수로(西部用水路) 간선 둑을 겸용하였었다. 이 서부용수로는 원통천과 연결되었던 바, 물이 넘치면 여수토교(餘水吐橋)에서 수위조절을 하였으나, 그 곳이 약간 높은 지대여서 인가가 하나 둘 늘어났다. 이 인근에 농경에 이용하는 허술한 나무다리가 하나 있었으나, 인적도 드물고 오랜 세월 방치하여 ‘삭았기 때문’에 이 다리를 ‘삭은다리(사근다리)’라 불렀고, 이것이 바로 ‘이 마을의 이름’이 된 것이다.
- 서부1교·서부2교·서부3교장제로 상에 있으며 서부간선수로를 넘는 다리가 셋이 있는데, 그 중 제일 동쪽에 위치하여 첫 번째가 되므로 ‘서부1교’라 하였다. 이 서부간선수로가 갈산1동과 갈산2동의 경계선이 된다. 계속 서쪽으로 오면서 서부2교(부평-갈산동), 서부3교(대우차 정문 앞)가 있다.
- ⑦천대고가교장제로상에 있으며 ‘갈산동에서 경인고속도로를 넘어 작전동으로 가는 고가교’이다. 명칭의 유래는 알 수 없다.
- 작전차도육교갈산동에서 경인고속도로를 넘어 ‘작전동으로 가는 옛 도로상에 있는 차도’이다. 전에는 이곳이 작전동에 속하였기 때문에 ‘작전차도육교’라 한 것이다.
- ⑧서부간선수로(西部幹線水路)1923년 한강토지개량조합(한강수리조합)에서 만든 ‘농업용수로’로 김포공항 방면으로 낸 것을 동부간선수로(東部幹線水路)라 하였고, ‘갈산동 쪽으로 올라온 것은 서쪽으로 흐른다 하여 서부간선수로’라 하였다. 옛 사근다리 근처(지금은 안병원 근처)에서 원통천과 만나도록 되어 있다.
- 여수토교(餘水吐橋)사근다리 근처에서 전의 서부용수로는 원통천과 연결되어 있었고, ‘넘치는 물을 토해내기 위한 여수토(餘水吐)’를 만들어 ‘수위조절을 하였고, 그곳에 놓은 다리이기 때문’에 ‘여수토교’라 했다.
삼산동
1789년(정조 17) 작성된 『호구총수』방리에 부평부 서면 소속 ‘삼산’이란 지명은 없었고, 필사본인 『조선지지자료』와 일제강점 초의 『조선전도부군면리명칭총람』에도 기재된 바 없다. 1940년 일제가 왜식 정(町)을 둘 때, ‘삼립정(三笠町’이 등장한다. 광복 후 ‘삼산동(三山洞)’이 편제되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나, ‘삼산(三山)’이란 명칭의 정체성에 의문점이 있다.조선조 말까지 없던 ‘삼산(三山)이란 지명은 일제의 잔재’로 추정된다. 왜식 정명(町名) ‘삼립(三笠)’은 러·일 전쟁 때, 일본 전함이었던 ‘미가사마루〔三笠丸〕’의 ‘삼립(三笠)’에서 ‘삼(三)’을 광복 후, 동이름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산동’은 예전 부평군 서면 ‘후정리(後井里)’ 지역으로 ‘뒤우물, 또는 후정동(後井洞)’이라고도 하였다. 삼산동은 이 마을에 ‘산이 셋’이 있다는 뜻인데, 영성산(靈成山)과 장수못은 이곳에 있으나, 조산(造山)은 계산동에 있으며, 장수못(장도못)은 산이 아니니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는 1924년 부평수리조합(한강수리조합)을 설치할 때, 갈산(葛山)에서 영성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뚫고 ‘서부간선수로란 용수로(用水路)’를 건설한 바, 그 때 파내 쌓은 흙더미를 흔히 ‘흙터머지’ 라고 불렀다. 이 ‘흙터머지’를 소위 ‘조산(造山)’으로 보고, 이에 ‘영성산’과 ‘갈산’을 합하여 ‘삼산(三山)’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삼산’은 ‘영성산과 갈산, 그리고 금산’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금산’은 저 멀리 청천동에 있어서 이 역시 삼산이란 지명에 이끌리어 지형을 견강부회한 것이다. 삼산동에는 대단위 아파트지구가 조성 되어, 2006년 말 현재 1·2동으로 분동되어 있다.
- 후정리(後井里)·뒤우물후정리는 앞의 『호구총수』(1789) 시절부터 있던 마을이름이다. 갈산의 동쪽 줄기가 길게 흘러 영성산으로 이어져 갔는데, 갈산 밑에 갈월리마을이 있고, 그 동쪽으로 너머에 삼태안 같이 된 곳에 우물을 파고 마을이 생겼으므로, 등성이 ‘뒤에 큰우물’로 인하여 마을이 생겼다 하여, ‘뒤우물 또는 후정리(後井里’라 하게 된 것이다.
- ①영성미·벼락바위·흙터머지·흙더미·2구후정마을 동쪽500m 정도인 삼산동 90번지 일대에 표고 100m에 불과한 산이 영성산(靈成山)이다. 이 산과 인근 상황에 대한 기록은 1842년 『부평부읍지』부터 등장한다. 이 영성산에 대하여 앞의 읍지에 “이 산 우편의 바위는 강암(舡巖)”이라 했는 바, 남쪽으로 마을을 지나 방죽머리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 상부가 모두 부서져 이곳 사람들은 ‘벼락바위’라 불렀고 그것이 ‘그대로 마을이름’이 되기도 했다. 1924년 한강수리조합을 설치할 당시, 갈산에서 영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끊고 서부간선수로를 팠는데, 이 때 흙을 파서 제방을 쌓고 남는 흙을 마을 입구인 삼산동 76번지 일대에 높이 쌓아 놓았다. 여기에 마을이 형성돼 ‘흙터머지, 또는 흙더미’라 부르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이것이 이곳 ‘전체의 마을이름’이 되기도 했다. 전에는 후정리 본동을 ‘1구(區)’로 하고, 영성미를 ‘2구(區)’라 하여 ‘2구’라고도 불렀다. 그리하여 ‘영성미, 벼락바위, 흙더미, 2구’ 등은 다 이 마을의 이칭들이다.
- ②삼산월드체육관2006년 10월 삼산동에 신축,개관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제 규모의 체육관.
- ③삼산사거리장제로와 청천로가 만나는 사거리로 삼산동의 이름을 따서 ‘삼산사거리’로 하였다.
- ④영성산(靈成山)·영성뫼후정마을 동쪽 500m쯤인 삼산동 90번지 일대에 표고 100m쯤 되는 곳에 잘 생긴 산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영성산’, ‘영성뫼’라고 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성산은 1842년 『부평부읍지』부터 기재되어온 산이지만, 1943년 경인고속도로의 전신인 국방도로의 건설 때, 토취장이었기 대문에 산의 형태가 없어지고 지금은 산 밑둥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 목숙통(苜蓿通)·목수통목숙교가 있는 근방으로 이곳이 지대가 높아 세 하천이 합류한 곳의 물을 앞의 『읍지』에는 ‘장도지(長陶池-큰 질그릇 형상의 못)’라 했다. 이곳에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직포(直浦)로 통수시켰다. ‘목숙’이란 콩과에 속하는 월년초로서 목초로 많이 사용되는 거여목(개자리)이 자생하는 지역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목숙통→목수통’의 음운 탈락형도 같이 씌었다.
- 목숙교(苜蓿橋)원통천, 청천, 석천의 세 하천이 모인 장제(長堤)의 물은 직포천(直浦川)으로 입류하고, 이 ‘직포에 가설된 나무다리’를 ‘목숙교’라 불렀다. 지금은 이곳의 물길을 크게 확장하고 다리도 콘크리트로 새로 놓았다.
- ⑤삼산교(三山橋)서부간선수로를 건너 주공임대아파트 입구에 새로 생긴 큰 다리로, ‘삼산동에 있으므로 삼산교’라 한 것이다.
- 서부간선수로1924년 한강수리조합을 설치할 당시 갈산에서 영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끊고 서부간선수로란 용수로를 팠다. 김포공항쪽의 동부간선수로와 반대로 ‘서쪽으로 난 수로이기 때문에 서부간선수로’라 한다. 삼산동을 지나오기 때문에 삼산동에도 같은 이름이 있다.
- 데부뚝서부간선수로의 둑을 흔히 ‘데부뚝’이라 한다. ‘데부뚝’은 ‘대보(大湺)둑’이 음운변천한 것으로 역시 ‘큰 둑’이란 뜻이다. 그러나 영성미 앞 차씨네뚝(약 10정보)이나 더 남쪽으로 있는 천일농장뚝(약 60정보)이나, 북쪽의 도두머리방죽뚝(약 180정보)도 모두 ‘데부뚝’이라 불렀다.
- 장제(長堤)·장성제(長省堤)영성미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을 ‘영성미들’이라 하고, 그 앞으로 지금의 삼산동, 중동, 상동의 경계를 이루는 삼산동 141번지 일대에 ‘원통천과 맑은내, 돌내〔石川〕’ 등의 세 하천이 한 데 모여 큰 못을 이룬다. 이 물을 막기 위한 긴 둑들이 ‘목숙교’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제방뚝이 길어’ 이를 ‘장제, 또는 장성제’라 했다.
- 벼락바위·배바위·배다리·강암(舡巖)『부평구읍지』 산천조에 “영성산은 부평부 동남쪽 넓은 벌판 가운데 1,600m쯤 되는 곳에 있고, 그 오른쪽에 큰 돌이 있어 배바위, 즉 강암(舡巖)”이라 하였는 바, 이 바위는 세 하천이 합류하는 삼산동 148번지의 ‘바다 같은 넓은 물 가운데에 홀로 우뚝 서 있어서 마치 항해 중인 돛을 단 배와 같다’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또 이 바위 하부에는 다리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서 ‘배다리’라고도 하며, ‘그 구멍사이로 배가 드나들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이 바위 상부는 모두 부서져 있었는데, 이것은 예전에 벼락이 떨어져 그리 되었다고 ‘벼락바위’라고도 부른다. 지금 그 바위는 흔적만 남아 있다.
- 장두못[長頭池]·장수못·장도지(長陶池)장두못이란 못이 도두머리 앞쪽에 있었는 바, 도두머리와 까치말 사이의 ‘곤논틀 물이 이 장두못으로 흘러들었고’, 이 물은 다시 장성제 밖으로 흘러 목숙통에서 직포로 입류되었다. 1924년 부평수리조합이 생겨 이곳에 배수로를 설치하면서 못은 없어지고, 지하통수로의 물이 솟아 웅덩이가 되었다. 장두못의 ‘장(長)과 두(頭)’는 모두 ‘크다’는 뜻으로 ‘매우 큰 못’ 또는 ‘중요한 못’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앞의 『읍지』에 기재되어 있는 ‘장도지(長陶池)의 도(陶)는 질그릇으로서 매우 큰 질그릇 형상을 한 못’인 듯하다. 가뭄이 심할 때에는 이 장두못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므로, 장두못은 영성산(靈成山)과 함께 예전부터 신성한 장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장천이개[長川溪]·장천이내장두못에 연결되는 시내로 영성산에서 시작했다. 장도못이 큰 못이므로 이와 연결된 조그마한 개천도 큰 개울로 생각하고 긴 장(長)자를 써서 ‘장천이개’라 한 듯하다. 한편 앞의 원통천이 매우 ‘긴 하천’이므로 이곳에서는 특별히 이 하천을 ‘장천이내’로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 ⑥직포·직포천(直逋川)목수통에서 벌말까지 이르는 개울을 ‘곧게 팠기 때문’에 ‘직포 또는 직포천’이라 따로 부른다.
부개동
부개동은 본래 부평군 동소정면 마분리(馬墳里) 지역으로 ‘말무덤’이 있어 ‘말무덤, 마분’이라 하였다. 부개동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올 때, ‘부평이 처음 시작되는 곳(열리는 곳)이라서 부개동’이라 하였다는 설과, 마을 뒷산인 ‘부개봉(富開峯, 復蓋峯)’에서, 또는 ‘산 위에서 볼 때 산 앞이 넓게 열려 있어서 부개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부개동은 2006년 말 현재 1·2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 마분리(馬墳里)·마분·마분이·말무덤이곳에 ‘말무덤’이 있어 ‘말무덤, 마분, 마분리(이)’라 하였다. 원래 우리 민족은 말고기를 먹지 않아 말이 죽으면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 전언에 의하면, 예전 말을 교통수단으로 쓰던 때의 ‘대야원, 오류원, 구슬원, 오류역’이 모두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말이 죽으면 이곳 말무덤으로 왔다고 하며, 가까운 ‘마장뜰’도 말을 사육한 국영목장이었으니, 죽은 말은 모두 이곳에 매장하여 ‘말무덤, 마분(馬墳)’이라 한 것이 이후 마을 이름이 된 것이라 한다. 고어(古語)에 ‘말’은 ‘크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말무덤’이 말을 묻은 무덤이 아니라 많은 시신을 묻은 ‘큰 무덤’으로 풀이 할 수도 있다. 병자호란 때에 청의 군대가 마분이에 주둔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를 더욱 뒷받침 해준다.
- ①굴재미·굴째미쌍굴철로다리에서 서울쪽으로 오른쪽에 삼태안 같이 우묵한 마을이 ‘굴재미’이다. 이곳은 원래 금마산(錦馬山)의 북맥이 등잔산(燈盞山)이란 조그마한 구릉을 이루고 이것이 계속 북으로 이어져 이곳에서 끝을 맺는 한 산줄기의 끝뿌리였다, 1899년 경인철도 부설공사 때 철둑을 쌓아 우묵한 골이 생기게 되고, 또 여기에 마을이 생기니 ‘굴재미’라 했 다. ‘뫼(산)>미’로 변천했고 ‘마을이란 의미의 지명소’의 하나이다.
- ②등세이안말 뒤쪽(북쪽) 등성이에 경인국도가 뚫리어 일신동 쪽으로 활처럼 크게 휘어 내려가도록 되었는데, 이 도로를 따라 집이 하나 둘 생기니 안말에서 볼 때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서 ‘등세이’라 불렀다.
- 신궁동(新宮洞)·새굴재미·새굴·새말굴재미 옆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 신궁동이다. 1940년경 일제는 부평 조병창 확장공사에 이어 일신·구산동 일대의 땅을 강제 수용하여 부평에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하였다. 이 때 이곳의 물자 수송을 위하여 경인철로의 인입선(引入線)을 부설하였는데, 지대가 낮아 굴재미의 산줄기 흙을 파다가 철로뚝을 쌓으니 이곳이 철로 분기점이 되고, 토취장 자리는 집터로 변하여 ‘또 하나의 굴재미 마을’이 생겼다. 그리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말, 새굴 또는 새굴재미’하다가 광복 후 사람들이 마을 형국이 궁궐같이 감싸였다고 하여 ‘신궁동(新宮洞)’이라 하였는데 널리 쓰이지를 못하였다.
- 산동네한국아파트가 있는 쪽에서 부개산 북쪽 골짜기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마을이 생겼다 해서 ‘산동네’라 한다.
- ③새말원래 벌판이었으나 개간하여 새로 마을이 형성되니 ‘새말’이라 불렀는 바, 현재 부평동중학교 근처이다.
- 신복동(新福洞)·고니새말1920년 경 일본사람 고시니[小西]가 방죽을 막고 개간하여, 마을이 생기게 되니 ‘고니시말’하던 것이 나중에 고니새말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 후 1950년대에 마을 유지들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고니새말을 ‘신복동’이라 고쳐 부르기로 하였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 안말‘마분리의 원마을’을 ‘안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마을이 ‘양지바른 안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안말이라 하였다.
- 장고개길부개2동과 부개3동의 경계를 이루는 길을 ‘장고개길’이라 한다. 장차 이 길은 서쪽으로는 서구와 경계인 ‘장고개를 넘어 가도록 되어 있어서 장고개길’이라 하였다.
- 신복사거리‘장제로와 길주로가 만나는 사거리’로 주민들이 고니새말 쪽을 신복동이라 고쳐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살린 것이다.
- ④등잔산(燈盞山)부개산 북쪽 줄기의 작은 봉우리가 ‘등잔산’인데 이 산 구릉이 경인철도에서 끊겨 굴재미를 이루었으며 이 산줄기가 부개동과 부평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조그마한 등성이 산이 ‘등잔불을 켜는 접시 모양’이라서 ‘등잔산’이라 한다. 그런데 이곳에 변전소가 생겼고 지금은 한국전력공사 부평지점이 자리 잡고 있어, 주민들은 등잔산이란 이름이 변전소가 들어올 것을 예감한 이름이라 신통히 여기고 있다.
- ⑤부개산(富開山·復蓋山)부개동에 있는 산으로, 1946년 일본식 동명을 청산할 때 부개산(富開山)의 이름을 따서 부개동이라 하였다. 현재 이 부개산의 줄기에 부개정(富開亭)이 있다.
- 가자골·가재골일신동과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로, ‘가〔邊〕’의 고어가 ‘’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음상을 가진 ‘가재’에 유추(類推)되어 ‘가재가 많기 때문’에 ‘가재골’이라 하였다고 전해오는 곳이 많다. ‘가재울, 가작골, 가정’ 등이 그런 지명들이다.
- 송장굴·송장골산동네가 있는 골짜기가 ‘송장굴(골)’이다. 원래 이곳은 으슥한 골짜기인데다 무덤이 더러 있어서 송장굴이라 불렀다.
- 호박굴·호박골송장굴과 가자굴 사이에 있는 골짜기인데 호박밭이 있었다 하여 호박굴이라 부른다.
- 길등성이고개·길재·긴재경인도로가 일신동 쪽으로 활처럼 크게 휘어져 내리막길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이 길을 ‘길 등성이에 있는 고개’라 하여 ‘길등성이고개’, 혹은 ‘길재’라 하였다. ‘긴재’도 긴 등성이의 뜻으로 ‘길재’와 같다.
- ⑥송신고가교경인도로에서 경인전철로를 넘어 부개2동에 있는 부평통신소로 가는 ‘고가다리’로. 근처에 ‘송신소가 있어서 송신고가교’라 하였다.
- ⑦길무지들·길우지현재 부개역에서 부평 쪽으로 ‘전철로와 경인도로 사이에 있는 들’을 ‘길우지, 또는 길무지들’이라고 했는 바, ‘긴 들의 뜻’으로 추정된다.
- ⑧뱃들·벳들부평송신소 동쪽에 있는 들로 상당부분은 송내(부천)에 포함된다. 이곳은 ‘홍수 때 물이 차면 배를 띄워야 했기 때문’에 ‘뱃들’이라 하게 된 것이다.
일신동
현재의 ‘일신동’은 『호수총구』방리의 부평군 동소정면 항동(航洞)과 구산리(龜山里, 九山里) 지역 일대이다. 일신동이란 광복 후 일제 지명을 버리고 ‘갈수록 점점 새로워진다’는 좋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항동(航洞)·황굴·항굴이 마을은 현 부개초등학교가 있는 마을(마분리 안말)에서 남쪽으로 등성이 너머 남향으로 ‘배 모양같이 길게 자리한 부개산록의 마을’로서 철거되기 전에는 5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중세국어시기(14~17세기 말) 이후의 고어(古語)에서는 ‘크다’는 의미의 단어가 ‘하다’였으며, 이것의 관형사형이 ‘한’이었다. 따라서 현대어의 ‘큰골’은 ‘한골’이 되고, 이 ‘한골’이 역행동화(逆行同化)되어 ‘항골’도 되고 또 ‘황골’도 된다. 중세국어 이후 ‘한쇼>황소, 한새>황새’가 색에 의해 명명된 단어가 아니라 ‘큰소, 큰새’ 뜻이다. 실제로 ‘항동리’ 지역은 큰 골짜기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항동은 배가 항해하는 것 같은 마을이 아니라’, 단지 ‘큰 마을, 또는 큰 골짜기마을’를 뜻한다.
- 구산동(九山洞)·귀산리(龜山里)구산동은 예전의 부평군 동소정면 귀산리(龜山里)지역이다. ‘귀산리(龜山里)’가 『조선지지자료』에는 ‘구산리(九山里)’로 표기되었다. 예전 리(里)의 편제에서 광복과 함께 일신동이 되었다.
- 군부안현재 주공아파트 남쪽에 있는 마을로 ‘군부대 안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안’이라 부른다.
- ①귀(구)산(龜山, 九山)성주산(부천에 있음)의 서봉(西峯)에서 북쪽으로 뻗은 형상이 마치 ‘거북등’ 같아서 ‘귀산(龜山)’이라 하였다.
- ②금마산(錦馬山)금마산은 부개봉 위에 있는 산으로 ‘산의 형국이 고운 말등 같아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 금마산도 원적산과 같이 지도상에는 철마산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어 고쳐야 한다. 한편, 이 산을 ‘만수산(萬壽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만수동으로 뻗은 금마산 줄기의 한 봉우리를 가리키며, 북쪽의 부개봉과 같이 최근에 생긴 명칭이다.
- 용봉산(龍鳳山)‘무네미고개 서쪽에 있는 산’으로 현 수현(水現)마을의 북쪽 뒷산이다. 장수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고 상서로운 뜻으로 작명한 것이다.
- ③상아굴·상마굴외과순환도로 밑의 중앙병원에서 남쪽으로 군부대 입구가 있는 골짜기 일대로, 큰 골짜기여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노인들은 ‘코끼리와 말의 형상’이라 하여 ‘상마굴’ 또는 ‘상아굴’이 된 것이라도 한다.
- 범골·범굴·벙굴금마산 동남쪽으로 있는 깊은 골짜기로 옛날에 ‘범이 살았다’고 하여 ‘범골’이라 하였다.
- 여우골금마산 동쪽 골짜기로 ‘여우가 산다’고 하여 ‘여우골’이라 했다.
- ④구산천(九山川)‘상아굴과 무넘이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로, ‘구산동을 관통’해 ‘구산천’이라 한다.
- 항동교(航洞橋)‘항동리에 있던 다리이기 때문에 항동교’라 한다.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장무두들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⑤범굴고개·범고개범골로 해서 만수동으로 넘어 다녔던 고개로 ‘범굴고개 또는 범고개’라 한다.
- ⑥무네미고개·무넘이고개[水越峴, 水峴]·무네미길구산(龜山)과 용봉산(龍鳳山) 사이, 곧 구산동에서 장수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이다. 지금은 8차선 도로로 크게 확장되었고, 또 위로는 서울외곽고속순환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송내지하차도에서 장수동으로 넘어가는 순환도로 밑의 길을 ‘무네미길’로 부른다. 우리나라 전역에 ‘무넘이, 무네미’ 또는 한자로 ‘수유(水踰)’ 계의 지명이 산재하거니와 모두 ‘물넘이’에 근원을 두고 있고, 대개는 분수령(分水嶺)과 관계가 있는 지명소(地名素)이다.
- ⑦비루고개·별리고개[別離峴]·별고개·성현(星峴)비루고개는 ‘황굴에서 지금의 만수동 만부(萬富)마을 쪽으로 넘어다니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한양에서 배 타러 갈 때 서해바다로 통하는 길목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한 길은 ‘오달기주막거리(구월초등학교부근)-황토꼬지(시청부근)-관교동-문학동을 거쳐 사모지고개〔三呼峴]-능허대’로 이어지고, 또 다른 한 길은 중국의 무역선이 닿았던 수산동(壽山洞) 포구에 이르렀다. 한양에서 험난한 먼 뱃길을 전송 나온 가족과 친지가 이곳에서 ‘작별을 나눔’으로써 ‘별리고개[別離峴]’라 부르던 것이 ‘비루고개’로 변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별리고개’가 ‘별고개’가 되고, ‘별고개를 한자로 성현(星峴)이라 잘못 표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온조(溫祚)와 비류(沸流) 형제는 고구려를 등지고 남하하여 삼각산에 올랐는데, 온조는 한산(漢山)에 도읍하고, 비류는 온조와 헤어져 미추홀에 비류국을 도읍할 때 ‘비류가 이 고개를 넘었다’ 해서 ‘비류고개’라 한 것이 후에 ‘비루고개’로 변했다는 전설도 있다. ‘벼랑’의 중세국어가 ‘벼~벼로’였고, 이들이 ‘벼루, 비리, 벼랑’ 등으로 다양한 변천을 겪었다. ‘비루고개’는 ‘벼랑고개’, 곧 ‘가파른 고개’의 뜻이지만, 지명에 이끌리어 후대에 ‘별리(別離)의 전설이 윤색’되거나, ‘벼’를 ‘별’로 유추하여 변형된 곳이 대부분으로 1842년 『부평부읍지』에도 성현(星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십정동
십정동(十井洞)은 예로부터 인천부 소속이었다. 『조선지지자료』는 다소면(多所面) ‘하십정리-아말’로 기재되어 있고, 1914년 일제의 개편 때에는 부천군 다주면(多朱面-다소·주안면을 합한 면) 십정리(상·하)라 했고, 1940년에는 인천부 소속, 광복 후 1946년에는 십정동고개 동편만 부평출장소 관내로 변경되었고, 1968년부터는 북구 소속, 1995년부터는 부평구 소속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 ‘우물이 열, 또는 더운(열)물이 나는 우물이 있으므로’, ‘열우물, 또는 십정(十井), 십정리’라 하였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십정동은 원마을인 함봉산 서편 골의 ‘윗열우물’로 음지편, 양지편, 구석말로 구성되어 있고, 수출5공단 일대의 ‘아랫열우물’로 이루어져 있다. 2006년 말 현재, 십정1·2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 ①구석말동항사 절이 있는 일대로서 양짓말과 음짓말 사이 북서방향으로 ‘쑥 들어가 있어’, ‘구석말’이라 한다.
- ②양짓말·양지편윗열우물 62번지 일대로서 마을 동편이며, ‘해가 잘 드는 양지편’에 있는 마을이므로 ‘양지편, 또는 양짓말’이라 한다.
- ③음짓말·음지편윗열우물 22번지와 144번지 일대로서, ‘함봉산 줄기의 서쪽 산 밑이라 겨울에는 해가 짧아’ 응달이어서 ‘음지편, 또는 음짓말’이라 부른다.
- ④잿말현 이학식당이 있는 곳에서 윗열우물 쪽으로 등성이가 있고, 예전에는 이곳에 집이 두 채 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 고개의 고어인 ‘재’를 지명어로 한 ‘잿말’이라 하였다.
- ⑤참새미·삼새미현 십정공원 입구 부근으로 예전에 집이 다섯 채 정도 있었으며, 이곳에 물 좋은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을 ‘참샘’이라 불렀고, 이 마을을 ‘참새미’라 하였다. 한편 이곳에 집이 세 채 정도 있었기 때문에 ‘삼새미’라 불렀다고도 한다.
- ⑥큰말·넘말서구 방향으로 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아랫열우물’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서쪽편 마을은 크고 동쪽 마을은 작았다. 그래서 큰 쪽을 ‘큰말’이라 하고 작은 쪽을 ‘작은말’이라 불렀다. 또한 작은말 쪽에서는 큰말이 길 너머에 있기 때문에 ‘넘말’이라 불렀고, 큰말쪽에서는 작은말을 마찬가지 이유로 ‘넘말’이라 하였다.
- 작은말·넘말아랫열우물에서 길을 사이에 두고 동쪽마을은 ‘마을이 작기 때문’에 ‘작은말’이라 한다. 또한 큰마을 쪽에서는 길 너머에 있기 때문에 ‘넘말’이라고도 불렀다.
- ⑦백범로(白凡路)·장수로(長壽路)십정사거리에서 서쪽으로는 서구 경계를 넘어 가좌사거리 방향, 동쪽으로는 간석오거리를 지나 수원 방향으로 시흥시 경계에까지 이르는 길이 백범로(白凡路)이다. 이 길은 장수동을 지나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 ‘장수로’라 이름하였으나, 인천에서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백범 김구(金九)’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백범로’로 개칭하였다.
- ⑧열우물길열우물사거리에서 서쪽으로는 서구 경계를 넘어 가좌동, 동쪽으로는 동암역을 거쳐 농촌지도소에 이르는 길을 ‘열우물길’이라 한다.
- 벽돌막사거리백범로와 중앙공원길이 만나는 사거리로, 남동구와 경계를 이룬다, 전에 이 근처에 ‘벽돌공장’이 있어서 ‘벽돌막사거리’로 하였다.
- ⑨십정사거리‘백범로와 경원로가 만나는 사거리’로 십정동에 있으므로 ‘십정사거리’로 했다.
- ⑩열우물사거리‘열우물길과 경원로가 만나는 사거리’를 말한다. 예전부터 ‘십정동을 열우물’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살려 ‘열우물사거리’로 하였다.
- 동암역경인전철역 중에서 백운~주안역 사이의 역으로 예전에 이 일대를 ‘쇠골’이라 불러왔고, 이곳에(주안산 일대) 동(銅)을 캐는 광산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 선내뜰다리[仙來橋]·선래다리현재 농촌지도소 앞에 있었으며, 선내개울을 건너 서구로 가도록 놓인 다리이다. ‘선내뜰에 있기 때문’에 ‘선내뜰다리’라 했다. 사래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선래개울’이라 한다. 선래개울은 원래 이곳에 배가 들어왔었다는 뜻인데 한자를 ‘배 선(船)자에서 신선 선(仙)’자로 바꾸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반래천이라고 적기도 하는데 이것은 ‘선래천(船來川)’의 잘못이다.
- 장수굴다리십정동 십정사거리에서 간석오거리, 장수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장수로(長壽路’라 하였고, 이 도로가 경인전철도 밑을 지나가므로 그 굴다리를 ‘장수굴다리’라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장수로를 백범로로 개칭’하였기 때문에 ‘장수굴다리는 백범굴다리’로 하거나 아니면 ‘십정굴다리’로 바꾸어야 한다.
- 뒷산‘구석말의 뒤’에 있기 때문에 ‘뒷산’이라 부른다. 서구의 가좌동과 부평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 배꼬지고개현재 새시장이 있는 등성이(주안변전소 쪽)로 염전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 ‘배가 들어 왔던 배곶〔船串]이었기 때문’에 ‘배꼬지고개’라고 불러왔다.
- 한가지고개·서낭고개·열우물고개열우물사거리에서 동암역 쪽으로 치닫는 가파른 고개이다. ‘한가지산에 있는 고개’이기 때문에 ‘한가지고개’라 한다. 이곳에도 ‘서낭당이 있어’, ‘서낭고개’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이 고개를 ‘열우물고개[十井峴]’로 부르기도 한다.
- ⑪서낭당고개‘양짓말에서 가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금도 ‘성황당나무’가 있다.
- ⑫열우물고개·십정현(十井峴)백운역에서 동암역 사이의 고개를 ‘십정현(十井現), 열우물고개’라 하고, 이 고개 너머 산중턱에 있는 마을을 ‘열우물’이라 한다.
- 뒷고개구석말에서 가좌동 변전소가 있는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마을 뒤에 있는 고개’이기 때문에 ‘뒷고개’라 부른다.
- 열우물고개[十井峴]·우물목고개[井項峴]광무 3년(1899)에 발행된 『부평부읍지』지도에는 ‘십정현(十井峴)’으로 나와 있고, 1842년(현종 8)에 편찬된 읍지 지도에는 ‘정항현(井項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고개는 부평삼거리에서 경인도로를 따라 동암역 쪽으로 넘어가면서 동암초등학교 직전에서 우편 십정동으로 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열우물로 가는 고개 또는 열우물에 있는 고개’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우물목고개’는 ‘부평에서 열우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되는 고개’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열우물고개’와 ‘원통이고개’가 같은 고개가 되는 셈이나, 사실은 고개가 둘이 있어서 부평‘쪽의 고개는 ‘원통이고개’이고 십정동 쪽의 그것은 ‘열우물고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십정동 사람들은 ‘한가지고개’를 ‘열우물고개’라 한다.
- ⑬긴골‘아랫열우물 쪽에서 윗열우물 쪽으로 깊이 나 있는 골짜기’를 ‘긴골’이라 한다.
- ⑭사래골[士來谷]·사리골[沙利谷]·성지골부평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는 쪽에서부터 선래개울[仙來川]이 흐르던 계곡을 말한다. 이 골짜기는 모래가 많이 흘러 내려왔다 해서 사래골[沙來谷]로 불렀으나, 사래골[士來谷], 사리곡(沙利谷)이란 변한 명칭도 써 왔다. 또한 이 골짜기를 ‘성지골’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