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사택
검정사택은 동네의 집들 가운데 집 벽을 콜타르를 먹인 종이로 지은 집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지금 부평 산곡동에 있는 도깨비시장 일대를 말한다. 그러나 최근 주택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다. 도깨비시장은 과거 미군부대 유출 물건을 팔 때 단속이 나오면 게눈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졌다하여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다.
검정사택
경인철도의 부설과 부평역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가 부설되었다. 경인철도가 부설되기 이전에 인천과 서울을 잇는 교통은 도보나 우마차를 이용한 육로 교통, 그리고 수로를 이용한 뱃길에 의존하고 있었다. 경인철도의 부설은 단순히 운송수단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혁을 수반하였다. 경인철도 부평역은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거점 역이었다. 개통 당시 인천 지역의 정류장은 인천(제물포, Chemulpo), 축현(싸리재, Saalijy), 우각동(소뿔, Sopple), 부평(Poopyong) 등 4곳에 불과했다. 부평역의 개소로 인하여 전통시대 계양산 아래 있었던 부평의 중심은 새로운 중심지인 부평역 일대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부평에는 대규모의 공장 지대와 시가지가 조성되는 등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공업지대로의 변화를 맞게 된다.
초기 경인철도 승차권
(사진:부평역사박물관)
미쓰비시제강(부평공원)
현재 부평공원 자리는 과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의 기계·금속 공업단지가 부평에 새롭게 들어섰고, 이 공장들은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시설로 전환되었다. 부평에 들어선 중공업 공장 중 대표적인 것은 히로나카(弘中) 상공이다. 히로나카 상공은 1937년 공장 부지를 매수하여 1939년 대규모 기계 공장을 완공하였으나 1942년 전범기업으로 유명한 미쓰비시(三夌)에게 인수되었다. 광복이후 한국군 88정비대대로 바뀌었다가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현재 부평공원에는 일제강점기 부평의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평화의소녀상과 강제징용노동자상이 건립되었다.
강제징용노동자상과 평화의소녀상
(사진:부평구청)
부영공원 지하시설
캠프마켓 왼쪽에 위치한 부영공원에는 지하시설이 존재한다. 2014년에 진행한 문화재시굴조사 중 지하시설을 확인하였으나 사업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추가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0년 4월 캠프마켓 관련 기록을 수집·보존하는 아카이빙 작업 준비를 위해 진행되어 6년만에 조사를 재개했다.
지하시설은 폭이 약7m, 높이 약2m 의 콘크리트 박스형태이다. 오랜기간 땅속에 있다보니 공기질이 좋지않아 전체 규모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특이한 것은 출입구 왼쪽에는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더 깊은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어 지하에 또 다른 공간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지하시설 통로에는 차량 바퀴자국이 있었으며 폐쇄하면서 출입을 막기 위한 콘크리트 잔해가 여러군데 쌓여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만들어진 지하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부평공원 지하시설
(사진:부평문화원)
부평공업단지의 조성
일제가 패망한 후 부평의 산업기반시설 대부분은 가동을 멈췄고, 그 후 20여년간은 침체기였다. 그런 부평에 다시 산업화의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이다. 그러나 1964년 10월 수출공단으로 서울 구로동 지역이 우선적으로 선정됨에 따라 인천시는 같은 해 10월 부평지구를 별도의 공업단지로 지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부평은 공단 건설에 따른 부지확보와 조성이 용이하고 고용인원이 풍부하며, 항만 및 공항과 가까워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부평변전소와 부평정수장이 있어 공업용 전기 및 용수의 공급이 수월한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65년 6월 16일 부평지역이 수출공단으로 지정되었으며, 동년 11월 23일 ‘인천수출산업공단’의 정식인가를 얻었다. 1968년 연말까지 총 50개의 기업체가 입주·지정되었는데, 50개 업체의 업종을 살펴보면 섬유가 가장 많았고 금속과 전자, 공예, 농축가공, 유리, 광물의 순이었다. 인천수출산업공단은 1971년 11월 ‘한국수출산업공단 제 4단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73년_한국수출산업공단 견학_부평여자중학교
(사진:부평역사박물관)
부평신촌
부평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촌이라 불렸다. 이곳은 해방 이후, 70년간 주둔해온 미군부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기지촌’ 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던 곳이다. 기지촌이란 외국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을 뜻한다. 인천육군조병창과 미군기지 애스컴을 거치면서 부평의 신촌은 기치촌으로 성장했는데 1980년대까지도 이국적인 문화가 범람하던 곳이었다. 미군클럽과 양키시장 등이 대표적인 이미지였다. 현재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촌
(사진:부평역사박물관)
부평은광
인천가족공원 일대에 지하 깊숙한 공간에 지금은 폐광된 부평은광이 있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인천가족공원 부지의 전체에 해당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때 한 일본인이 광업권을 등록시켜 개발한 것이 시작이다. 광복이후 여러 사람을 거치다가 영풍광업이 본격적으로 부평광산으로 개발을 하였다. 한때는 전국 은생산량의 70%를 생산했다고 한다. 이후 폐광 신청을 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광산이 있는 곳에 인천가족공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부평은광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그와 관련한 소문만 남아 버렸다. 부평은광을 재조명하기 위해 문화원에서는 2017~2018년 그 때 당시의 생활모습과 역사,문화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은광의 내부 상황을 보기 위해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통로인 수평갱도를 조사하려 하였으나 안전성이 확보되지 못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부평광산 당시 사진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평의 역사 지방제도의 개편
전통시대 부평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주부토군, 통일신라에는 장제군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도호부, 계양도호부, 길주목 등으로 불리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부평부로 개칭되며 ‘부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부평부는 1413년(태종 13)에 부평도호부로 승격된 후,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였다. 개항 이후, 잇따른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부평 지역은 수차례 변혁을 맞이한다. 1895년 부평부는 인천관찰부에 예속됨과 동시에 부평군으로 강등되었다. 이내 인천관찰부가 폐지되고 경기관찰부가 생겨나면서 부평군은 경기관찰부에 속하게 되었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재편함에 따라 부평군은 경기도 부평군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기존의 부평군 지역은 면 단위로 분화되어 부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1940년 기존의 부평군 지역은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68년 부평,서곶출장소를 통합하여 북구가 되었다가 1988년 서부지역이 서구로 바뀌고 1995년 경인고속도로를 기준으로 계양구와 부평구로 나뉘면서 다시 부평의 이름이 등장했다.
부평군읍지(1899년)
(사진:부평역사박물관)
부평전투승전 기념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평 역시 인민군에 점령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연합군이 서울 수복을 위하여 경인로를 따라 진격하던 중 크고 작은 전투가 부평지역에서 약 2-3일간 벌어졌다. 전사에 기록된 부평지구의 전투는 원통이고개전투, 부평역 전투, 부개동 송내 전투 등이다. 이중 가장 큰 승리를 한 것은 인천상륙작전 3일째에 일어난 원통이고개 전투인데, 경인국도를 따라 이동하던 북한군 보병부대를 한·미 연합군이 매복하여 전멸시킨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250여명의 북한군 중 200명이 사살된 반면 우리 측은 1명의 부상자만 발생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서울 수복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 산곡동에는 ‘화랑농장(花郞農場)’이 세워져 상이용사들의 자립과 자활의 터전이 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름만 남아있을 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부평전투승전기념비는 부평생활문화센터공감168 건물 옆에 있다.
원통이고개전투
(사진:부평역사박물관)
부평전투승전기념비준공1주년행사
(사진:부평구청)
부평지하호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지역에 있는 20곳(2020년기준)의 부평지하호은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 일본육군조병창과 관련된 지하시설이다. 분지형 지형인 부평지역은 서쪽이 산지로 막혀있고 동쪽이 개방된 형태를 보이며 넓은 평야가 있으며 경인철도를 통해 인천항과 서울과의 접근성이 좋은 곳이었다. 1930년대 이후 대륙침략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이런 부평을 최전선의 가장 큰 군수공장이자 병참기지로 조병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종전 직전인 1945년 3월 조병창 내부문서인 「예하부대장 회동시 무기 생산 상황보고」 에 따르면 부평지하호 A~C구역에 해당되는 위치에 실포지하시설, 실포지금반지하시설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평지하호필드워크
(사진:부평문화원)
부평지하호
(사진:부평문화원)
부평평야와 부평수리조합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여 전국적인 쌀 부족에 시달렸다. 도매업자들은 가격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가격을 담합하여 쌀값이 폭등하게 된다. 이 때문에 1918년 일본 농민들 사이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들어 일본은 자국의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였다. 너른 평야지대이면서 인천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이 있었던 부평은 산미증식계획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1923년 부평 평야 일대의 관개 개선을 목적으로 한 부평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1925년 사상 유래 없는 대홍수로 많은 피해가 발생하자 부평수리조합은 재해복구와 함께 관개· 치수 사업을 병행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토지 개량과 수리시설의 정비는 부평농민을 위해서 실시된 것이 아니라, 조선을 식량기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의도가 실현된 것에 불과하였다.
부평수리조합 배수지 갑문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삼릉(미쓰비시) 줄사택
1930년대 후반 일본의 대륙침략의 광기는 절정에 달하였고 이를 위해 신속한 군수물품조달을 위해 항만과 철도를 갖추며 서울이 가까운 부평을 주목하였다. 1941년 일본은 부평에 33만평부지에 인천육군조병창을 개창하였으며 1938년 히로나카상공이 들어서고 1942년 4만7천평의 미쓰비시제강이 만들어지면서 부평은 한강이남 최대의 군수공업지가 되었다. 히로나카상공 근무자를 위해 사택지를 만들었으며 미쓰비시제강으로 인수되며 미쓰비시사택으로 바뀌었다. 미쓰비시의 한자 독음이 삼릉이었으며 이 때문에 삼릉(미쓰비시줄사택)으로 마을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삼릉에 거주한 노동자들은 강제동원된 조선인들로 보여진다.
히로나카 상공 사택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애스컴시티
미군 제 24군단 예하부대 제 24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24, 약칭 ASCOM 24)는 인천육군조병창과 인근의 군수공장 부지에 자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긴 주둔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애스컴의 규모가 방대하여 마치 하나의 도시와 같다며 미군들은 이곳을 ‘애스컴 시티’라고 불렀다. 주한미군 보충대를 비롯하여 보급, 의료, 통신, 운송, 공병, 항공지원 등 다양한 병과들을 포함한 미군부대 주변에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 각종 상권이 발달하였으며, 트로트 일색이던 당시 가요계 분위기와 달리 빌보드차트의 인기 팝송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부평은 경제·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주한미군 방위협약수정에 따라 부평지역 내 많은 병력들이 타 지역으로 단계적 이전을 실시하였고, 이후 축소된 미군 주둔 지역에는 ‘캠프마켓(Camp Market)'이 조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애스컴시티 부대모습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영단주택
산곡동 근로자주택이라고도 한다. 부평구 산곡동87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1940년 인천육군조병창 근로자들이 주로 거주했던 이곳은 광복후, 부평미군기지 관련 종사자들이 머물렀고, 이후 부평수출공단이나 한국베어링, 대우자동차 등 공장 근로자들이 자리를 채워갔다. 부평의 여러 근로자주택지들 가운데 건설당시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 규모면에서도 전국적으로 큰 곳에 속한다.
영단주택
(사진:부평구청)
인천성모병원 부지
지금의 인천성모병원 부지는 세월이 지나면서 주인이 계속 바뀌어 왔다. 1940년 개교를 한 소화고등학교가 있었으며 1945년 박문여자중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이후 1956년 현재의 박문여고 자리로 이전하면서 그 위치에는 1955년부터 2009년까지는 부평경찰종합학교가 대신했다. 오랜기간 경찰관 교육을 담당하다 경찰종합학교는 현재는 충남 아산으로 이전했다. 1955년 성모자애병원이 개원하여 여러차례의 병상증설 및 증축을 통해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소화여고
(사진:부평역사박물관)
경찰학교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인천육군조병창
1930년대 후반, 계속되는 전쟁으로 일본은 병기와 군수품의 보급이 절실해졌다. 기존까지 일본은 병기제작소인 조병창을 도쿄, 오사카, 나고야, 고쿠라 등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은 평양에 병기제조소를 두고, 추가로 만주 봉천에 남만주조병창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본 육군은 한반도 내에 조병창을 설립하여 병기의 제작과 보급을 원활하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인천이 조병창 부지로 결정되었다. 부평은 경성과 인천을 관통하는 지리적 위치와 공장 부지로 사용할 만한 넓은 부지가 있어서 군수 기지가 조성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 인천육군조병창 건립이 시작되어, 1940년에 창설을 맞았다.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기제조공장이었다. 매달 소총 4천정, 총검 2만정, 소총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만개, 차량 2백량 등을 생산하며 전쟁 물자를 조달하였다. 심지어 일본육군이 비밀리에 추진한 잠수정 관련 부품도 만들었다. 이곳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은 다른 군수 공장 노무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작업에 내몰렸다. 1944년 조선총독부는 국민징용령을 시행하고 조병창에선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까지 강제로 동원해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현재의 제물포고, 인천고, 인천기계공업고, 인천여고, 박문여고 학생들이 조병창에 입창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학생들에게는 월급도 주지 않았다. 조병창내부에서는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엄중한 감시 속에 통행도 제한되었으며 자신의 숙소와 작업장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통행이 가능했고 의심스러운 사람은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고 한다.
인천육군조병창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인천육군조병창 본부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자동차 산업의 기수
1962년 ‘새나라 자동차’가 과거 ‘국산자동차’ 부지에 공장을 설립하고 차량을 조립·판매함으로써 부평은 국내 자동차 산업 중심지로서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러나 새나라 자동차는 일본의 ‘닛산자동차’ 블루버드 P301형을 단순히 부품수입방식으로 조립·판매하는 것에 그쳐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이듬해 해체되었다. 이후 1965년에 ‘신진자동차공업’이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을 인수하여 외국 회사들과의 합작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새한자동차(1976)’, ‘대우자동차(1983)’, ‘지엠대우(2002)’를 거쳐 ‘한국지엠(2011)’으로 이어지는 등 부평은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구심점이 되어왔다.
새한자동차
(사진:부평역사박물관)
공장내부사진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천일염전표지석
기존까지 우리나라는 바닷물을 솥에 넣고 달이는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 연료비, 시간 등이 필요하였다. 그러다가 개항 이후, 청국에서 수입한 값싼 천일염이 일반에 보급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조선 내에 천일염전을 구축하고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고자 하였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천일염전인 주안염전이 주안면 십정리(현 부평구 십정동)에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시험용 염전을 축조하였는데, 여기서 생산한 소금의 품질이 양호하였다. 이를 계기로 1909년부터 서해로부터 이어지는 갯골을 따라 대규모 염전 지대를 조성하여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중찬 염전을 시작으로 인천 짠물의 시대가 펼쳐졌다. 1930년대 소래염전이 들어서며 인천은 전국 최대의 소금 산지가 되었다.
주안염전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천일염전표지석
(사진:부평문화원)
한하운시비
1949년 12월 나시인(癩詩人) 한하운은 수원천변에서 함께 거주하던 한센인들을 이끌고 새 정착지인 부평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한하운은 「나시인 한하운 시초(1949년)」를 발표한 뒤 유명세를 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부평 만월산 아래 한센인 요양소인 ‘성계원’을 설립하고 자치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양돈과 양계사업을 펼쳐 한센인들의 자활과 자립을 위해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센인 자녀들을 위한 보육시설을 신설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복지 사업을 펼쳐나갔다. 그는 여러 어려운 사오항 속에서도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하였고, 제 2 시집인 「보리피리」와 자서전인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를 발표하여 당시 큰 감동을 주었다. 1960년 한하운 시인은 그토록 원하던 한센병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1975년 십정동 자택에서 안타깝게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시비는 백운공원내에 세워져 있다.
한하운 보리피리
(사진:부평역사박물관)
한하운_시비
(사진:부평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