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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아물지 않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상흔… 전수조사로 활용방안 찾자 (2019-08-14 중부일보)

[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아물지 않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상흔… 전수조사로 활용방안 찾자

카페가 된 강화군의 조양방직

우리 동네에도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이 있네!

“그냥 일본 탄광에 안 가려고 달아났어요. 동네 어른 하나가 일본 탄광에 갔다가 굴이 무너져서 죽었거든요. 그래서 친구들 다섯 명이랑 달아나서 집에 숨어 있었는데, 1주일 만에 김포경찰서 순사에게 잡혀갔어요. 인천경찰서로 갔다가 징역 1년 받고 개성소년형무소에 들어갔지요. 가서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요. 독방에도 갇히고. 그런데 거기서 내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다 죽게 되니까 간수가 집에다가 시체 찾아가라고 연락했어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시체 치우기 싫다고 연락한 거지요. 부모님이 시신을 덮으려고 광목 다섯 마를 구해서 왔어요. 그런데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거야. 그래서 둘러메고 나왔다고.(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아이들)”

1927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춘만은 1945년 1월 9일 새벽, 일본 탄광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기 직전에 탈출한 죄로 소년수가 되었고, 형무소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했다. 이같이 일제강제동원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는 울림이 있다. 생생하다. 그래서 경험자를 찾아 이야기를 들으며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곤 한다. 그러나 이제 경험자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어쩌다 운 좋게 만난 90대 후반의 노인들은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일제강제동원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다른 길이 있다. 바로 우리 동네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이하 아태전쟁유적)이라는 현장이 주는 울림과 교훈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한 후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일본·한반도·중국·만주·남사할린·동남아시아·중서부 태평양지역에 남긴 십 수만 개의 전쟁유적이다. 전후 일본은 정부 차원의 아태유적 전수조사를 거쳐 일부는 공원으로, 그리고 일부는 문화재 등록을 거쳐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일본정부는 할 생각이 없었으나 시민들이 진정한 전쟁 책임 묻기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했기에 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해국인 한국 정부는 현황 파악도 하지 않아 공식 자료는 없고, 미완성 상태의 개인 조사 결과물만 있다. 학계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아태전쟁유적의 유형에 대한 고민도 없다. 편의상 식민통치유적, 생산관계유적, 군사유적, 기타유적으로 구분해보자.


부평시민들이 찾아낸 지하호 일부

경기도 지역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은 몇 군데?

그렇다면 한반도에 그리고 경기도의 아태전쟁유적은 얼마나 되는가. 2019년 6월 현재 한반도 전체의 아태전쟁유적은 총 8천566개소이다. 1945년 당시 행정구역에 포함된 경성이나 개성, 금화, 개풍, 장단 등을 제외하면, 경기도의 아태전쟁유적은 483개소가 된다.

경기도 지역의 아태전쟁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종류는 생산관계유적이다. 483개소 가운데 435개소나 되는 생산관계유적은 대부분 탄광광산이지만 78개소의 군수공장이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기를 생산하던 인천육군조병창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군조병창은 구일본육군에서 사용한 각종 무기를 생산하는 기관인데, 1869년 오사카의 총포화약제조국과 조병사(造兵司)가 맹아였다. 그 후 조직 확대를 거쳐 1923년 육군조병창이 되었다. 일본은 본토에 많은 조병창을 두었으나 일본을 벗어난 지역에는 조선에만 두었는데, 바로 현재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이다. 인천육군조병창은 민간 군수공장이 아니라 조선군관구부대 육군병기행정본부 소속 군부대 조직이었다. 1939년 중반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1941년 5월 총검공장과 견습공 연습공장을 완공한 후 소총, 총검, 탄환, 소형포탄, 중형폭탄 등을 만들어서 중국 전선으로 보냈다.

얼마 전 카페로 개조해 현재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강화군의 조양방직도 아태전쟁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1936년 민족자본이 설립한 인조견 공장이었으나 일본이 1940년 사치품 생산과 유통을 금지하는 7.7금령을 발표한 후 군수용 직물생산공장으로 전환되었다.

인천시 남구 문학동의 인천소년형무소는 독특한 아태전쟁유적이다. 1936년에 문을 열어 18세 미만 소년수 가운데 소학교 3년 정도의 능력을 갖춘 소년을 수용했다. 이들이 소년수가 된 이유는 다양하지만 징용을 거부한 대가로 수형자가 된 소년들도 있었다. 당국은 징용을 거부한 아이들을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위반과 국가총동원법 국민근로동원령 위반에 따라 수감하고, 수감 후 다시 강제노역지에 투입했다. 당국은 이곳에 수용된 소년수들을 강제노역장에 동원했다. 일부는 멀리 흥남비료공장으로, 또 일부는 인천 학익동 다나카주물공장에 동원했다.

경기도의 대표 군사유적은 군비행장 5개소이다. 조선군 제17방면군 제20사단 소속이었다. 고양비행장(고양시 화전동 화전역 부근, 현재 한국항공대학교 관리), 수원비행장(수원시 권선구 장지동와 평리동 일대)과 오산비행장(성고면 오산리), 시흥비행장(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 평택비행장(평택군 팽성읍 안정리)이다. 진해해군시설부 소속 평택비행장은 연인원 2만여 명의 조선인과 공사도구, 우마차까지 징발해 비행장을 닦았다.



경기도의 지역별로 본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

483개소의 유적을 군별로 살펴보면 가장 많은 지역은 어디일까. 가장 많은 유적을 가진 지역은 인천부였다. 인천부의 아태전쟁유적 115개소의 특징은 군수공장이 86개소에 달했다는 점이다. 인천육군조병창 제1제조소는 무기를 생산했지만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잠수함이나 선박은 동구 만석동의 조선기계제작소(주) 인천공장 등 11개소 민간군수공장을 육군관리공장으로 지정하고 생산하도록 했다.

일본은 미군의 한반도 해상 봉쇄로 선박을 통한 군수품 수송의 길이 막히자 잠수정을 통해서라도 군수품을 수송하려 했다. 1942년 12월 육군참모본부는 잠수수송정 제작을 결정한 후 1943년 7월 조선기계제작소(주) 인천공장을 육해군관리공장으로 지정해 인천육군조병창 제1제조소 감독 아래 잠수정을 만들도록 했다. 육군이 공장에 파견대까지 보내 직접 관리 감독한 결과, 1944년 8월 제1호 잠수정 등 총 4척을 육군에 납품했다.

당시 한반도 이남 지역 최대의 군수공장지역이었던 인천육군조병창은 해방 후 미군과 한국군의 주둔지를 거쳐 현재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의 주한미군 군수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캠프마켓은 미8군에 속한 제빵공장이었는데, 지금 제빵공장은 멈추었으나 철문은 굳게 잠겨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올 날은 기약할 수 없다.

캠프마켓이 자리한 인천 육군조병창 유적

인천육군조병창은 생산한 무기를 은닉하고 조병창 무기생산공장을 이전할 목적의 지하호(부평일본군지하호)를 만들었다. 인천육군조병창의 노무자들과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 바위굴을 파들어갔다. 숫자는 알 수 없는데, 부평시민들이 직접 찾아낸 지하호는 24군데다.

인천육군조병창에 이은 인천의 대표적인 군수공장은 당시 부천군 부내면(현재 부평구)에 있었던 미쓰비시제강(주) 인천제작소이다. 육군병기행정본부 명령으로 특수강판을 만들던 거대한 공장건물은 사라지고 지금은 부평공원이 되었다. 이 공장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숙소는 미쓰비시 사택이라 한다. 개발의 파고에 밀려 철거 중이지만 철거를 기다리는 사택의 모습은 볼 수 있다. 현재 부평문화원을 중심으로 인천육군조병창과 지하호, 미쓰비시사택 등 세 곳의 세계유산 등재 운동이 닻을 올렸다.

안양면 비산리에는 조선비행기공업(주)가 운영하던 공장이 있었다. 1944년 7월 당시 대표 기업가이자 친일파로 알려진 박흥식과 백낙승 등이 비행기와 부품을 만들 목적으로 설립했다. 당시 일본이 전투기 생산에 허덕였으므로 이를 도울 목적이었다. 1945년 4월 공장을 건설하면서 시험비행기를 1대 만들어 납품했다.

포천군 영중면에는 스미토모광산(주)이 금은동을 채굴하기 위해 문을 연 영중광산이 있었다. 1945년 2월 영중광산 광부들은 제주도로 가서 자살특공대용 소형 함정을 감추어둘 지하굴을 파다가 해방을 맞았다.

고양시 화전면(당시 은평면 수색리)에는 경성조차장 공사장이 있었다. 1940년 경에 철도국 의뢰로 하자마구미(間組)가 주관한 공사장이었다. 철도국은 당시 철도역이 철도 물동량을 소화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조차장 건설에 나섰다. 경성조차장은 약 10만여 평 달하는 어마어마한 면적에 예산 1천300만원을 투입한 공사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완공되지 못했다. 지금 현장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무연고합장묘가 남아있다.

무너져 가는 미쓰비시 사택 중 일부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 아태전쟁유적과 마주하다.

우리 동네에서 만나는 아태전쟁유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고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왜 굳이 마음 불편한 어두운 역사 이야기와 만나야 하는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경험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태전쟁유적은 가슴 아픈 역사 현장이지만 반전평화교육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자산이다.

어떤 방법으로 다가서면 좋을까. 출발점은 전수조사이다. 전수조사를 마친 후에는 유적의 상태에 따라 활용할 수 있다. 어느 곳은 간단한 표지판을 세우고, 어느 곳은 공원이나 뚜껑 없는 박물관을 세우는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전수조사부터 안전장치 설치까지 모두 정부의 역할이다. 전쟁 가해국인 일본정부도 했건만 피해국인 한국정부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글을 쓰는데 김현석, 우리 마을 속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 : 인천광역시 부평구(2019)가 도움이 되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박사




[출처] -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박사 (중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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